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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은퇴한 선배 한마디에 … 울산바위 비밀 풀렸다

이명희·문성욱·최석문(왼쪽부터)씨가 6070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 지난 7월 개보수한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을 등반하고 있다. [사진 주민욱]

이명희·문성욱·최석문(왼쪽부터)씨가 6070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 지난 7월 개보수한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을 등반하고 있다. [사진 주민욱]

# “아냐, 거기 아냐. 오른쪽 크랙(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가야 해.”
2018년 6월 29일. 이홍진(66) 당시 한림대 의대 교수가 설악산 울산바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손정준(53) 스포츠클라이밍연구소 대표가 “아,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후배들 ‘리볼팅’ 돕는 등반 노장들
50년대 개척된 암벽 루트 자료 부족
방치된 길 개보수 작업 벽에 부딪혀
선배들 기록·증언에 30여 곳 되살려

장군봉 구공길도 개척자 도움 받아
“보존과 이용 사이서 볼트 최소화
후배 위해 개념도 등 정보 남겨야”


 
2019년 7월. 최석문(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씨가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의 개척자를 찾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이종길(72)씨와 연락이 닿았다. 최씨는 ‘리볼팅’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봤고 이씨는 “좋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구공길의 ‘올바른 길’을 알려줬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5.14급 등반을 한 손정준(오른쪽)씨가 아들 승민씨와 함께 설악산 울산바위 개보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5.14급은 국내에서 성공한 이들이 손정준·김자인씨 등 1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고난도다. [사진 손정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5.14급 등반을 한 손정준(오른쪽)씨가 아들 승민씨와 함께 설악산 울산바위 개보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5.14급은 국내에서 성공한 이들이 손정준·김자인씨 등 1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고난도다. [사진 손정준]

리볼팅(rebolting). 생소한 단어다. 국어사전에도, 영어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이 낱말은 ‘볼트를 다시 설치한다’는 뜻이다. 허술해진 이음새를 다시 조인다는 것이다. 불안정을 안정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로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 그리고 암벽 등반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바위의 오래된 볼트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볼트를 설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암벽 등반이 본격화한 지 60년이 지났다. 두 세대다. 인기 있는 길은 명맥을 유지하지만, 어느 길은 잊힌다. 암벽 코스까지 접근로가 지나치게 길거나 바위 흐름을 거스르고 억지로 낸 길들이 대개 그러하다. 풀이 자라고 확보물은 녹이 슨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잊히거나 부식되는 경우도 있다. 등반 세대의 단절, 개념도의 부재 등이 이유다.  
지난달 27일 손정준씨의 아들 승민씨가 리볼팅을 하기 위해 울산바위를 등반하고 있다. [사진 손정준]

지난달 27일 손정준씨의 아들 승민씨가 리볼팅을 하기 위해 울산바위를 등반하고 있다. [사진 손정준]

개보수를 마친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을 지난 8월 등반하고 있는 이명희씨. [사진 주민욱]

개보수를 마친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을 지난 8월 등반하고 있는 이명희씨. [사진 주민욱]

10년 전부터 울산바위 루트 살린 손정준씨
잊힐 뻔했던, 방치됐던, 위험해진 설악산 바위 코스 수십 곳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현역에서 은퇴하거나 경험 많은 선배들이 있다. 그들의 기억·기록과 후배들의 바위에 대한 이해가 맞물리고 있다. 바위 흐름 따라 자연스럽게, 안전과 모험의 저울질 속에 정교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홍진 교수는 손정준 대표와 산악회 후배인 박명원씨의 연락을 받고 울산바위까지 갔다. 서울대 문리대 산악부 출신인 이 교수는 1980년을 끝으로 암벽 등반을 접었다. 30세도 채 안 됐을 때다. 50년대 중반 개척된 울산바위 문리대(1~9번) 루트는 자료가 없었다. 하지만 이 교수의 기억은 생생하다. 모든 등반을 수첩에 기록해 놨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울산바위 등반은 75년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홍진 선배의 도움으로 미지의 세계로 남았던 루트들이 살아났다”고 말했다. 

이홍진 전 한림대학교 의대 교수가 1970년대에 설악산 울산바위를 등반하면서 남긴 기록. [사진 이홍진]

이홍진 전 한림대학교 의대 교수가 1970년대에 설악산 울산바위를 등반하면서 남긴 기록. [사진 이홍진]
이홍진 전 한림대학교 의대 교수가 1970년대에 설악산 울산바위를 등반하면서 남긴 기록. [사진 이홍진]
손 대표가 울산바위에서 소생시키는 루트는 무려 30여 곳. 10여 년 전부터 매달려 왔다. 절반 넘게 리볼팅이 완료됐다. 손 대표는 “울산바위는 자유등반의 집약체”라며 “미국 요세미티 등반을 꿈꾼다면 훈련지로 울산바위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설악산 적벽 루트도 리볼팅하는데, 볼트 1개 설치에 4년째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손 대표의 리볼팅 작업에는 아들 승민(23)씨가 함께 하고 있다.

 
이종길씨는 60대 중반인 6년 전까지도 암벽 등반을 했다. 그와 함께 장군봉 구공길을 개척한 전준수·김광수씨는 이미 세상을 떴다. 구공길이란 이름은 90년도에 개척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씨는 루트에 설치한 볼트를 미국에서 공수해 왔다. 당시로써는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볼트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울산바위 암벽 리볼팅 중인 손정준씨. [사진 손정준]

울산바위 암벽 리볼팅 중인 손정준씨. [사진 손정준]

지난 7월 최석문씨가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에서 리볼팅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주민욱]

지난 7월 최석문씨가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에서 리볼팅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주민욱]

문성욱(48·바위를찾는사람들)씨가 사위어 가는 구공길을 살리려 나섰다. 최석문·이명희(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씨와 함께 개척자를 찾아다녔다. 전준수씨가 아이거 북벽에서 사망할 당시 함께 등반했던 장형원(53)씨를 통해 이종길씨와 연락이 닿았다. 이종길씨는 “후배들을 위해 개보수를 허락했다”고 말했다. 4년 만에 구공길이 다시 태어났다.
 
"선배들 등반 흔적…개척자를 찾습니다"  
암벽 루트는 개척자의 허락 없이는 손댈 수 없는 게 등반 세계의 룰이다. 국립공원공단에서는 새로운 암벽 루트는 불허하지만, 안전 작업을  위해 개척자와 연락하기도 한다. 손 대표는 울산바위에서 문리대길 외에 요반·현용길도 리볼팅했다. 모두 개척자가 소속된 산악회와 소통 뒤 진행했다. 
 
문성욱·최석문·이명희 팀은 최근 “설악산 장군봉에 ‘히말라야 방랑자’라는 루트를 개보수했다”고 밝혔다. 고 김창호 대장을 기리는 이 루트의 이름은 새롭지만 ‘개보수’라는 표현을 썼다. 그들은 “녹슨 옛 확보물이 있어 선배들이 먼저 등반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 ‘개보수’라는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개척자를 찾으면 원래 루트명으로 바꾸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은 모두 자연 보존과 이용, 등반의 모험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신중을 기하며 볼트를 최소화했다고 한다.


지난달 4일 타이탄산악회 남궁우석씨가 설악산 미륵장군봉 타이탄길 개념도를 작성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달 4일 타이탄산악회 남궁우석씨가 설악산 미륵장군봉 타이탄길 개념도를 작성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개척자를 알 수 없고 버려진 루트들은 왜 나오는 걸까. 손 대표는“60~70년대 황금기를 맞은 국내 산악회가 80년대 후반에 스포츠클라이밍이 들어오면서 침체에 빠졌는데, 기존 루트들은 묻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른바 정통 산악회 세대와 스포츠클라이밍 세대 간의 간극으로 루트들이 관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기록의 부재·부실도 한몫했다. 손 대표는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 루트 개념도를 남긴다는 개념 자체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4일 설악산 미륵장군봉에서 만난 남궁우석(48·타이탄산악회)씨는 계속 무언가를 적고 그리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선배들이 낸 루트의 개념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손 대표는 “훌륭한 암벽 루트를 만든 분들이 현재 70대가 많아 서둘러야 한다”며 “은퇴한 선배들의 도움으로 바윗길이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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