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기생충도 동백꽃도… 허세와 가식의 그녀 ‘제시카’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셰익스피어가 불러준 이름, '욕망의 꽃'으로 피다

올해 1008만 관객을 끌어당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기생충’과 올 추석 개봉작으로 457만명이 관람한 ‘나쁜 녀석들: 더 무비’, 그리고 시청률 14%를 넘어 쾌속 질주하는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공통점은? 등장인물 중에 허세와 가식, 나아가 사기 혐의마저 짙은 여성이 있는데 그들 이름이 공교롭게도 모두 ‘제시카’다.

 

주의: 이번 ‘사소한 발견’은 그야말로 사소하다. ‘스크롤 압박’을 감수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먼저 ‘기생충’에서 박소담이 맡은 기정. 미대입시 재수생으로 극중 송강호-장혜진 부부의 딸이자 최우식의 여동생이다. 오빠를 위해 졸업장 위조까지 척척 해내 아버지로부터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수석입학감”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극중 이선균-조여정 집의 과외교사 자리 면접날, 박소담은 현관문 앞에서 자신의 허위 프로필을 노래로 읊는다. ‘독도는 우리땅’ 음률에 맞춘 가사는 이렇다. “제시카는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 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박소담)과 기우(최우식, 뒷모습)가 박 사장(이선균)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일명 '제시카 송'을 부르는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박소담)과 기우(최우식, 뒷모습)가 박 사장(이선균)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일명 '제시카 송'을 부르는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나쁜 녀석들’의 김아중이나 ‘동백꽃’의 지이수 경우엔 이처럼 구체적인 (허위) 프로필이 드러나진 않는다. 극중 정보만 보면 김아중이 연기한 제시카는 유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전과 5범의 감성사기꾼으로 본명은 곽노순이다. 2014년 방영된 동명의 OCN 드라마엔 없던 인물로 영화를 위해 추가됐다. 개봉 전 제작보고회에서 김아중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캐릭터”라면서 “이름(본명)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자칭 제시카”라고 소개했다. 극 중에서 한 팀을 이루게 된 마동석·김상중·장기용과 첫 만남 때도 '제시카' 발음에 버터 느낌을 유난히 강조했다. 
 
'나쁜 녀석들: 더 무비'에서 사기꾼 캐릭터 곽노순(제시카)을 연기한 배우 김아중. [사진 뉴스1]

'나쁜 녀석들: 더 무비'에서 사기꾼 캐릭터 곽노순(제시카)을 연기한 배우 김아중. [사진 뉴스1]

‘동백꽃’에서 지이수가 연기하는 제시카는 야구선수 강종렬(김지석)과 쇼윈도 부부다. 프리랜서 모델이라곤 하지만 딱히 하는 일 없이 ‘관종 SNS’만으로 광고 찍으며 먹고 산다. 7만7000 팔로어를 거느린 그의 본명은 박상미. 뉴요커 출신인 양 행세하지만 남편의 폭로에 따르면 “뉴욕은 어학연수 3개월을 갔다 왔을 뿐, 전라도 전주 토박이 출신”이다. 툭하면 "나 제시카야!" 하는 걸로 봐서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 영어 이름에 대한 집착은 젖먹이 딸 지선을 ‘레베카’라고 부르는 데서도 드러난다.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야구선수 강종렬(김지석)과 쇼윈도 부부인 제시카를 연기하는 지이수. [사진 KBS 캡처]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야구선수 강종렬(김지석)과 쇼윈도 부부인 제시카를 연기하는 지이수. [사진 KBS 캡처]

 
허영‧허언‧가식‧사기 캐릭터이되 미워할 수 없는 인간미. 도회적인 세련미에 연령상으론 20~30대인 이들 모두가 제시카인 건 우연일까. 그러고보니 요즘 방송 중인 SBS ‘배가본드’에서 치명적인 '팜므 파탈'로 등장하는 문정희도 ‘제시카 리’다. 여기선 글로벌 무기로비스트와의 인맥을 토대로 굴지의 무기업체 아시아담당 사장에 오른 인물로 제시된다. 테러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데도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하는 걸로 봐서 '제시카 계보'에서도 센 언니에 속한다.  
 
국내 최대포털 네이버에 ‘제시카’를 치면 제일 먼저 뜨는 인물은 걸그룹 ‘소녀시대’ 출신의 제시카(본명 정수연). 해외 유명인물로는 ‘엘리노어 릭비’(2015) 등에 출연한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42), 패셔니스타 출신으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사업가로 변신한 제시카 알바(38) 등이 뜬다.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중국계 싱가포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호주 출신 모델 제시카 고메즈(34)도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다. 그러고 보니 좀처럼 ‘굴욕’이 없는 이름 같긴 하다.
2017년 제시카 차스테인, [중앙포토]'

2017년 제시카 차스테인, [중앙포토]'

남성잡지 GQ매거진 2007년 8월호에 실린 제시카 알바(jessica-alba). [중앙포토]

남성잡지 GQ매거진 2007년 8월호에 실린 제시카 알바(jessica-alba). [중앙포토]

 
내친 김에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제시카를 쳐봤다. 드문드문 신문 지상에 등장하던 빈도가 급증한 때가 1988년. MBC에서 매주 수요일 밤 11시에 방영한 ‘제시카의 추리극장’ 때문이다. 원래 미국 CBS에서 12년간 방송된 인기 추리드라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을 연상시키는 주인공 제시카 플레처(앤절라 랜즈베리)가 가는 곳마다 사건을 만나고 이를 해결하는 시리즈물이다. 나중엔 일요일 오후 1시로 방송시간을 옮겼다. 
 
원로 배우 중엔 제시카 랭(70)이 있다. 1930년대 고전을 리메이크한 76년도 영화 ‘킹콩’에서 주인공 킹콩의 사랑을 받는 미녀 앤 드완 역으로 데뷔했다. 에로틱 스릴러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81)로 대중의 눈도장을 받은 뒤 82년 ‘투씨’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95년 ‘블루 스카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반전운동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최근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잭 니콜슨, 제시카 랭 주연의 1981년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중앙포토]

잭 니콜슨, 제시카 랭 주연의 1981년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중앙포토]

 
혹시 제시카란 이름에 특별한 이미지가 있는 걸까. ‘나쁜 녀석들’의 손용호 감독에게 김아중의 극중 가명을 왜 하필 제시카로 했나 물어봤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흔한 이름이라 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영어 이름 사이트 ‘베이비네임위저드’(babynamewizard.com)에 따르면 제시카란 이름은 특히 1980년대생에게 인기가 많았다. 호주의 경우 90년대 중반 여자아이 30명 중 1명 꼴로 제시카라서 '제시카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한국으로 치면 82년생 김지영 같은?!)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인기가 뚝 떨어져서 요즘은 작명 선호 100위권에도 들지 않는다. 어느 영어권 매체 분석으론, 너무 흔하고 왠지 '금발에 그닥 총명하지 않은 이미지'라나. 여기엔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에 등장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 제시카 래빗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풍만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 섹시한 몸짓의 제시카 래빗은 실존 인물과 애니메이션 통틀어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성 캐릭터로 꼽힌다. 
 
실사 인물과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함께 나오는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의 애니 캐릭터 제시카 래빗.

실사 인물과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함께 나오는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의 애니 캐릭터 제시카 래빗.

영어 기록문학에서 제시카란 이름이 처음 나오는 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1596)으로 알려진다. 악역의 대명사,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딸이 제시카다. 이 작품에서 제시카는 기독교도인 로렌초와 결혼하려고 하다가 샤일록이 반대하자 재산을 빼돌려 탈출하는 진취적인 인물. 어원은 성경 창세기 속 인물 이스가(Iscah)로 추정된다. 
  
참고로 ‘기생충’의 박소담-기정이 불렀던 ‘제시카 송’은 영화에 안 나온 뒷부분이 있다. CJ엔터테인먼트가 공개한 풀버전 악보 가사에 따르면 제시카는 유니세프 면접 경험이 있는 재원으로 은퇴하신 아버지는 한강에서 요트를 즐기고 어머니는 유치원 원장이다. 대학 3학년 때 시리아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아동 심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로 인해 미술치료를 공부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박소담)-기우(최우식) 남매가 불렀던 '제시카 송' 혹은 '일리노이 송'의 풀버전.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에서 기정(박소담)-기우(최우식) 남매가 불렀던 '제시카 송' 혹은 '일리노이 송'의 풀버전.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 설명 속 제시카, 정말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이 지은 저택에서 거품목욕을 해야 마땅한 ‘느낌적 느낌’ 아닌가. 비록 현실에선 역류된 X물이 올라오는 반지하 변기 뚜껑에 쪼그려 앉아 버티는 '위조 달인'일지라도 말이다. 셰익스피어 이래 420여 간 영미권과 한국까지 넘나들며 여러 굴곡이 많았구나, 너란 이름 제시카.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관련기사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