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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11월을 좋아하세요?

기자
한순 사진 한순

[더,오래] 한순의 시골반도시반(11)

시골집 입구에 있는 산사나무 빨간 열매도 하나둘 사라지고, 저 예쁜 초록 속에 그렇게 강렬한 욕망이 끝없이 뻗던 시절이 정점을 지나 갈색빛으로 하나둘씩 어깨를 떨어뜨린다. 시골 생활의 체험이 시작되면서 가장 놀란 것은 식물들의 욕망이었다. 계곡 물가에 핀 이파리의 연둣빛만으로도 수많은 위안을  얻었고, 돌 틈새에 뿌리를 내린 가녀린 잡초들을 보며 생명의 끈기를 배웠다.
 
그런데 한여름에 바라보는 식물들은 생명력의 싱싱함을 넘어 욕망의 분출을 보여주었다. 잔디 속에 뿌리를 내리는 바랭이는 가지에서 10㎝ 간격으로 또다시 뿌리를 내리는 치밀함이 있는가 하면, 넝쿨 식물들은 다른 나무의 발목부터 감기 시작해서 허리를 지나 목까지 감고 올라가 누가 나무이고 누가 넝쿨인지 모르게 뒤엉켜 자신들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에겐 애초에 '적당히’라는 개념은 없는 것 같고, 그들 몸속의 어떤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뻗을 뿐이었다.
 
넝쿨 식물들은 다른 나무의 발목부터 감기 시작해서 허리를 지나 목까지 감고 올라갔다. 누가 나무이고 누가 넝쿨인지 모르게 뒤엉켜 자신들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사진 한순]

넝쿨 식물들은 다른 나무의 발목부터 감기 시작해서 허리를 지나 목까지 감고 올라갔다. 누가 나무이고 누가 넝쿨인지 모르게 뒤엉켜 자신들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사진 한순]

 
늘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착하고 예쁜 식물이라고만 생각하다가 그들과 살면서 그들의 왕성한 욕망을 보게 되었다. 한여름 그들의 번식은 무서울 정도다. 오죽하면 시골 생활을 하다가 잡초 뽑기에 지쳐 다시 도시로 상경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을까.
 
그러나 끝도 없을 것 같은 그들의 욕망도 어느 한 계절로 접어들면서 잦아들기 시작한다. 밉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던 그들의 욕망이 주춤 힘을 잃고 어떤 큰 흐름의 조화를 위해 어깨를 떨어뜨릴 때 뭉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가 공항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남편과 나에게 허그를 하라고 했다. 나는 가능한 짐을 줄여 어깨에 배낭을 둘러멘 채 남편과 작별 포옹을 하였다. 눈물도 메말랐다. 그냥 가슴속에서 바스락하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친구와 함께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오른쪽, 왼쪽으로 서로의 발을 번갈아 뻗으며 킥킥거렸다.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기도 하고 친구가 잠이 깰까 봐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들도 지나갔다. 얼마를 하늘 위에 떠 있었을까? 친구는 뒤척이다 살짝 잠이 든 듯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가로 가늘고 촉촉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담요를 살짝 당겨 머리 위로 다시 뒤집어썼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식물의 욕망도 어느 한 계절로 접어들면서 잦아들기 시작한다. 욕망이 주춤 힘을 잃을 때쯤, 뭉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사진 한순]

끝도 없을 것 같은 식물의 욕망도 어느 한 계절로 접어들면서 잦아들기 시작한다. 욕망이 주춤 힘을 잃을 때쯤, 뭉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사진 한순]

 
비행기 삯을 아끼려 18시간의 비행 끝에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나에겐 첫 해외 나들이였고, 아직 파리에는 동양인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시테유니버스티에 숙소를 잡고, 체크인하자마자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 친구가 파리에서 숙소를 잡는 데 도움을 준 친구에게 인사를 가자고 나를 깨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친구는 화를 내며 나간 것 같았다. 낯선 곳, 처음 찾아든 곳에서 나는 아주 깊은 잠에 들었다. 자다 깨면 천장이 높고 하얀 시멘트벽이 보였다. 나는 어디론가 유배되었거나 도망친 것이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자 친구는 파리 시내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놓고 그날 다녀올 곳에 관해 설명했다. 지하철 표를 한꺼번에 10매 이상 구매하면 가격이 싸다는 것과 화장실 줄 서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친구는 유학생활을 했던 파리의 스승에게 인사를 갔고, 나는 배낭을 메고 파리 시내로 나왔다. 돈도 넉넉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아 맥도날드 패스트푸드 간판만 보아도 반가웠다.
 
햄버거 하나와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고 퐁피두와 오르세 미술관을 돌다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고 지하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오카리나의 가녀린 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계단을 다 내려오니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은 집시가 지하철 텅 빈 공간을 스피커 삼아 오카리나를 불고 있었다.
 
거리 악사의 오카리나 선율에 사로잡힌 나는 집시와 얼마간 떨어져 그대로 그의 음악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의 선율은 내 영혼을 잡아끌어 이리저리 한없이 끌고 다녔다. 지하철이 한 대 그냥 지나갔고, 두 대, 세 대가 지나가도록 그곳에 서 있었다. 오르세의 어느 미술품도 나의 마음을 이렇게 잡아끌지는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선로로 이어진 어둠 속을 보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 이곳에서 나는 더 낯선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방랑기 가득한 원시의 내가 올라왔다. 파리의 한적한 지하철역에서 민낯의 나를 만나는 일은 두렵고 떨렸다. 그대로 서서 민낯의 내가 고스란히 올라와 얼굴을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오카리나의 선율은 가슴에 칼을 긋듯 예리한 선율로 민낯의 길을 터주고 있었다. 시간은 멈추었고 이대로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몇 곡의 오카리나 연주와 몇 대의 지하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저 오카리나 선율을 따라나서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지하철 한 대가 들어왔다. 지하철 유리창 안 사람들은 불빛 아래 책을 읽거나, 연인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서 있기도 했고, 할머니는 깨끗한 옷차림에 교양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 파리에서 나는 더 낯선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방랑기 가득한 원시의 내가 올라왔다. 파리의 한적한 지하철역에서 민낯의 나를 만나는 일은 두렵고 떨렸다. [사진 pixabay]

모두가 낯선 사람들, 파리에서 나는 더 낯선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방랑기 가득한 원시의 내가 올라왔다. 파리의 한적한 지하철역에서 민낯의 나를 만나는 일은 두렵고 떨렸다. [사진 pixabay]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어 지하철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음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나, 나와 다르게 생긴 저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친구는 중국인 식당에서 파는 월남국수를 사주었다. 유학생들이 객지의 고단함에 지칠 때면 한 번씩 큰맘 먹고 사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빵 쪼가리로 늘 허기졌던 배가 빵빵한 국물로 채워졌다.
 
한국의 공항에서 만난 남편과 나는 어색한 웃음을 나누었다. 나는 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할 먼 곳까지 다녀온 이 느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고, 남편은 나 없는 시간에 대해 말하기가 쑥스러웠던 것 같다. 얼마를 운전해서 공항을 벗어나오자 남편이 “다시는 당신 혼자 어디 보내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길가에 은행잎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나 대신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노란색이 말이야, 미친년 빤스 색깔 같더라고.” 내가 없는 동안 열한 살, 다섯 살 두 아이와 앓아누운 노모 사이를 다니며 바라본 은행잎 색깔. 그도 얼마나 낯섦이 그리웠을까? 모든 책임을 벗어버리고, 이제까지 알던 모든 사람을 모른다 하며 얼마나 떠나고 싶었을까?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창밖으로 돌려 찻길에서 뒤집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았다. 11월이었다. 욕망이 한 꺼풀 내려앉는 11월. 낯선 곳을 향해 끝없이 넝쿨을 휘감던 촉수들이 안으로 잦아드는 11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화병과 허무의 광기가 비어져 나오는 11월이다. [사진 한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화병과 허무의 광기가 비어져 나오는 11월이다. [사진 한순]

 
"11월을 좋아하세요?"
낮고 고요한 음성으로 마치 간첩이 접선하듯 암호를 던진다.
낙엽이 떨어져 뒹굴고 쌓인 낙엽을 달리는 자동차가 다시 한번 뒤채는 11월을 좋아하세요?
숲은 여백을 점점 키우며 마음의 골밀도를 떨어뜨리는 골다공의 11월을 좋아하세요?
바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올 한 해 살아온 몇 달을 생각하고 남은 한 달을 비상처럼 간직한 11월을 좋아하세요?
마지막 사력으로 꽃보다 붉은 단풍을 피웠던 나뭇잎이 옅은 바람에 갈색 잎으로 허공에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11월을 좋아하느냐고요?
이제까지 알았던 모든 사람을 모른다 하며 떠나고 싶은 11월을 좋아하느냐 말이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화병과 허무의 광기가 비어져 나오는 11월을.
낯설고 퀭한 눈빛이 공기 속에 가득 담긴 11월 말이에요.
 
암호를 건넬 때 눈을 마주치는 것은 금물.
눈은 허공에 둔 채 낮고 그윽하게 건넨다.
“11월을 좋아하세요?”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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