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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군 개혁 시급하다”…펑더화이 극비리 귀국 전령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8>

양더즈(오른쪽)와 양융(왼쪽), 양청우(가운데)는 나이·경력도 비슷했다. 3양이라 불렸다. 양더즈는 훗날 총참모장까지 지냈다. [사진 김명호]

양더즈(오른쪽)와 양융(왼쪽), 양청우(가운데)는 나이·경력도 비슷했다. 3양이라 불렸다. 양더즈는 훗날 총참모장까지 지냈다.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 지원군의 원조는 ‘중국홍군’이었다. 홍군은 폭동으로 태동한 무장세력이었다. 비적 소리 들으며 정규군에게 쫓겨 다니는 동안 세력을 키웠다. 지휘관은 있어도 계급은 물론, 통일된 군복도 없었다.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에 편입되는 바람에 같은 군복 입고 장군 계급장 단 사람도 있긴 했지만 잠시였다. 일본 패망 후 내전(중공이 말하는 해방전쟁)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급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들 동지, 아니면 전우로 통했다.  
 

항미원조 지원군 원조 ‘중국홍군’
계급도 군복도 없었던 오합지졸

펑더화이, 군 현대화·정규화 추진
55일간 마라톤회의 열며 강행군

마오, 펑더화이 후임 사령관 물색
저우언라이는 양더즈·양융 추천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선포 후, 마오쩌둥은 군의 현대화와 정규화를 꾀했다. 소련을 형님으로 받들어 모실 때였다. “낙후된 군대를 뜯어고쳐야 한다. 남의 좋은 경험 흉내 내다보면, 언젠가 우리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소련의 모든 것을 따라 해라. 세계 제2의 우수하고 현대화된 혁명군대 건설이 시급하다.” 오랜 세월 보직은 있어도 계급 없이 굴러가던 군대이다 보니 공로자들이 많았다. 누구에게 어떤 계급 수여할지 골머리 썩던 중,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자 지원군을 파견했다.
  
다들 “동지, 전우” … 위계질서 문란
 
1953년 10월 허룽(賀龍, 앞줄 왼쪽 셋째)이 위문단 이끌고 북한을 찾았다. 북한군은 애들까지 계급장을 달았지만 허룽은 계급장이 없다. [사진 김명호]

1953년 10월 허룽(賀龍, 앞줄 왼쪽 셋째)이 위문단 이끌고 북한을 찾았다. 북한군은 애들까지 계급장을 달았지만 허룽은 계급장이 없다. [사진 김명호]

지원군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총사령관 펑더화이나 정치부 주임, 병단사령관도 계급이 없었다. 말단 부대는 초등학교 반장이나 분단장 같은 체제로 꾸려나갔다.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매달 동전 한 푼도 못 받았다. 전선에 있던 펑더화이는 짜증이 났다. 1951년 가을, 마오쩌둥에게 불편을 토로했다. “중국은 큰 나라다. 우리 인민해방군은 각자 근거지가 있었다. 지휘관끼리 만날 기회도 적었다. 조선은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흩어져있던 부대가 작은 나라에 와서 복작대다 보니, 예상 못 했던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규율과 예절, 내부 규칙이 제각각이다. 군은 계급으로 통솔해야 한다. 장기간 계급이 없다 보니 지휘에 어려움이 많다.”
 
펑더화이의 뺨에 작은 종양이 생겼다. 점점 커지자 부사령관 천껑(陳賡·진갱·진갱)이 귀국 치료를 권했다. 펑더화이는 병원 가기를 여자 잔소리보다 더 싫어했다. 치료 얘기만 나오면 화를 냈다. 보다 못한 천껑이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편지를 보냈다. 펑더화이의 증세를 설명했다. 저우는 펑더화이의 성격을 잘 알았다. 마오에게 달려갔다.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극비리에 귀국해라. 덩화(鄧華·등화)를 사령관 대리에 임명한다.”
 
마오는 베이징에 도착한 펑더화이를 베이징 의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펑더화이의 귀국은 국제적인 뉴스감이었다. 입원 수속도 가명을 사용했다. 의사들은 입원환자가 누군지 몰랐다. 온갖 검사를 다 했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너무 비위생적인 사람이다. 몇 개월간 목욕과 세수한 흔적이 없다. 내버려 두면 된다.” 마오는 그럴 줄 알았다며 펑더화이를 베이징에 눌러 앉혔다. “군 개혁이 시급하다. 지원군 총사령관직 유지한 채 중앙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처리해라.” 당부도 잊지 않았다. “개혁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역사는 개혁가들의 비극으로 가득하다. 서두르지 마라.”
 
1952년 11월 13일 마오쩌둥이 중앙군사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펑더화이가 중대 발표를 했다. “마오 주석의 뜻이다. 54년 1월부터 징병제와 계급제도를 실시하려 한다. 매달 계급별로 일정한 액수도 지급할 예정이다. 실현되는 날이 우리나라 국방건설의 기점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활발한 토의와 연구를 기대한다.” 회의는 55일간 계속됐다. “구체적인 방안 나오려면 3년 정도는 필요하다”고 합의했다. 항미원조 덕이라며 다들 좋아했다.
 
1953년 봄,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대신할 항미원조 사령관감을 물색했다. 저우언라이가 양융(楊勇·양용)과 양더즈(楊得志·양득지)를 추천하자 무릎을 쳤다. “싼양(三楊)중 양융만 조선 전선에 나가지 않았다. 귀국 중인 20병단 사령관 양청우(楊成武·양성무)와 교체해라. 양융도 국제전 경험이 필요하다.”  
 
펑더화이는 매일 군사위원회로 출근했다. 정전협정문에 서명하러 개성에 갈 때까지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지원군은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북한을 떠나지 않았다.  
 
1958년 10월,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주둔했다. 사령관도 펑더화이 한 사람이 아니었다. 덩화, 양더즈, 양융이 뒤를 이었다. 재임 기간은 양융이 제일 길었다. 1955년 9월, 중난하이에서 계급과 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장정과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공을 세운 60여만명이 준위 이상 계급장을 받았다. 10원수와 10대장 외에 상장 55명, 중장 175명, 소장 802명 등 장군 1614명이 탄생했다. 원수는 정치국원, 대장은 부총리 예우를 받았다.
  
원수는 정치국원, 대장은 부총리급
 
계급장 착용한 군복 입은 원수(元帥)들. 왼쪽부터 네룽쩐(聶榮臻), 펑더화이(彭德懷), 예젠잉(葉劍英). 앉아있는 사람은 뤄룽환(羅榮桓). [사진 김명호]

계급장 착용한 군복 입은 원수(元帥)들. 왼쪽부터 네룽쩐(聶榮臻), 펑더화이(彭德懷), 예젠잉(葉劍英). 앉아있는 사람은 뤄룽환(羅榮桓).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는 1955년 이전에 발생한 전쟁이었다. 원수 펑더화이와 대장 천껑을 포함한 448명의 장군이 참전했다. 상장 18명과 중장 52명, 소장 381명이었다. 장진호 전투를 지휘한 쑹스룬(宋時輪·송시륜), 펑더화이와 함께 일무일문(一武一文)을 담당했던 정전 담판 지휘자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은 우리의 대장에 해당하는 상장 계급을 받았다. 싼양도 상장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지원군 제1부사령관과 2대 총사령관을 역임한 덩화도 빠지지 않았다.
 
6·25 전쟁은 보면 볼수록 의문투성이다. 당시 신중국은 처리할 일이 많았다. 이웃나라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형편이 못됐다. 1998년 8월 홍콩의 호텔에서 중국 군사위원회에 오래 근무했다는 골수 마오쩌둥주의자에게 이런 말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양더즈가 지휘하는 19병단 정치부에 근무했다. 1951년 2월 16일 밤, 항미원조 일원으로 조국을 뒤로했다. 지원목적은 전선취재였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김일성은 수세에 몰렸다. 38선을 돌파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을 계속하면 중국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다. 동북에 기반이 단단했다. 조선족이 널려있는 동북에 망명정부라도 세우면 말릴 방법이 없었다. 조선족은 개성이 강했다. 김일성이 나타나면 몰려들 것이 뻔했다. 건국 초기동북인들은 마오쩌둥이 누군지 잘 몰랐다. 마오는 속으로 이 점을 우려했다. 참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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