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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외교 400여년 전 주역 사명대사의 글과 넋

임진왜란 직후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가 교토 고쇼지 승려들에게 남긴 유묵이 400여년 만에 한국 나들이를 했다. 왼쪽부터 ‘최치원의 시구’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법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직후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가 교토 고쇼지 승려들에게 남긴 유묵이 400여년 만에 한국 나들이를 했다. 왼쪽부터 ‘최치원의 시구’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법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곧바로 길을 가고 가다보면 비로소 그칠 곳에 이르리라(直道行行到始休)”(사명대사가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중)
 

임진왜란 때 명·일 ‘조선분할’ 저지
전후엔 교토서 ‘포로 송환’ 담판도
고쇼지 승려들에 남긴 유묵 5점
국립중앙박물관서 국내 첫 전시

비단을 두른 누런 종이에 힘차게 흘려쓴 서체. 임진왜란 강화 협상을 이끈 사명대사(1544~1610)가 400여년 전 교토의 고찰 고쇼지(興聖寺)에 남긴 유묵(글씨나 그림)이다.
 
고쇼지 창고 안에 잠들어 있다가 최근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실물이 확인된 ‘사명대사 유묵’ 5점이 400여년 만에 본국에 나들이했다. 15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막 오른 이번 전시는 박물관 측과 BTN불교TV가 공동 기획해 이뤄졌다. 이날 개막식에서 배기동 관장은 “일본(와세다대)에서 수학한 구본일 BTN불교TV 사장의 집요한 노력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새롬 연구사는 “시문과 서체에 모두 능했던 사명대사를 기릴 수 있는 기회이자 한·일 교류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증거물들”이라고 소개했다.
 
사명은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승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7년을 끈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일본에서 사망하면서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런 상황에서 사명이 1604년 일본으로 향한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에선 그의 행적비 및 실록 등을 토대로 사명이 비공식 외교사절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 담판을 하고 조선 민간인 포로 송환 협상을 했던 것으로 본다.
 
동국대 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회에 공개된 사명대사 진영(초상화).[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동국대 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회에 공개된 사명대사 진영(초상화).[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전문 관료가 아닌 사명이 이 같은 중책을 맡은 것은 전란 중의 ‘서생포 회담’ 활약 때문이다. 명나라 원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린 일본군은 강화를 꾀하다가 돌변해 정유재란을 벌였다. 일본 측 진의를 알기 위해 1594년 도원수 권율과 명군 장수 유정이 사명을 보내 울산 서생포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게 했다.
 
가토를 만난 사명은 명·일 사이에 추진돼 온 강화조건 속에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이 포함된 걸 알게 됐다. 사명은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명·일 강화를 저지시켜야 함을 설파했다. 이를 포함한 네 차례 서생포 회담은 “명·일 비밀회담으로 분할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한 최고의 외교전”(장철균 전 스위스주재대사)으로 평가된다.
 
사명의 외교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후 일본과 국교정상화 여부를 놓고 조정이 분열돼 있을 때 1604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사신을 보내왔다. 일본의 새 통치자가 된 막부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라면서 강화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전언이었다. 이에 사명에게 대마도를 방문해 진위 여하를 탐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사명은 대마도에서 3개월 머무른 뒤 그해 11월 일본 본국으로 향했다. 그는 1605년 2월과 3월 두 차례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를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 ‘후시미 회담’을 통해 ‘1.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 2.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를 교환한다. 3.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송환한다. 4.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한다’ 등의 협의 사항이 도출됐다.
 
일각에선 ‘사명이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기록도 전한다. 학계에선 사명의 노력 이후 공식 절차를 통해 수년간 송환된 조선인 숫자를 아우른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또 다른 우여곡절을 거쳐 1607년 조선이 첫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성사됐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유묵들은 당시 사명이 회담을 기다리는 동안 고쇼지 승려들에게 남긴 것들이다.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 5점이다. 이 가운데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고려 말 문신 유숙(柳淑, 1324-1368)의 시 ‘벽란도’를 차운(次韻)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부터 10여 년 간 감회를 담았다.  
 
시 전문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지 오래되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有約江湖晩 紅塵已十年 白鷗如有意 故故近樓前)’에는 일본에서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명의 의지가 배어 있다. 또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 1559~1619)에게 준 도호(법호)나 편지는 그가 교토 승려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음을 드러낸다.
 
서희외교포럼 대표이며 스위스 주재대사를 지낸 장철균 동덕여대 초빙교수는 “사명의 선문 필담은 일본인을 사로잡은 소프트파워나 다름없었다”면서 “서생포·후시미 회담에서 보인 그의 외교·협상력은 오늘날 경색된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내한한 고쇼지 주지 승려 모치츠키 고사이는 “평화를 사랑했던 사명대사의 정신이 오늘날 양국 관계에도 큰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개막식에 함께 한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는 “한일 양국 관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있어 이번 전시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고 말했다. 사명대사 초상화 등 총 7점이 선보이는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이어진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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