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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 총리 “폭격에 끄떡없는 강철 같은 수송라인 구축해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7>

1951년 5월 중순, 중국지원군 총부에 도착한 류쥐잉. 34세이다 보니 어리다는 소리 들을 만도 했다. [사진 김명호]

1951년 5월 중순, 중국지원군 총부에 도착한 류쥐잉. 34세이다 보니 어리다는 소리 들을 만도 했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참전 초기, 중국지원군은 뒤에서 바쳐줄 기관이 없었다. 보급을 제대로 못 받았다.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베이징의 중앙군사위원회에 여러 차례 전문을 보냈다. “수송역량이 수준 이하다. 4차 공세까지는 그럭저럭 때웠다. 보급을 전담할 후근사령부 설립이 절실하다.”
 

미 공군기 연간 5만9000대 출동
폭탄 19만 발 투하로 철도 쑥대밭

중국지원군 필수품 본국에 의존
수송로 파괴되고 보급품은 잿더미

“목숨 걸고 단절된 철도 복구할 것”
30대 류쥐잉 철도운수사령관 발탁

1951년 4월 하순, 5차 공세가 시작됐다. 물자 결핍이 여전했다. 펑더화이가 부사령관 홍쉐즈(洪學智·홍학지)를 호출했다. 결론만 얘기했다. “당장 귀국해라. 저우 부주석에게 전선 상황과 수송문제 상세히 설명해라.” 저우 부주석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의미했다. 홍쉐즈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와 동북군구(東北軍區)는 출국 부대를 위해 다량의 물자를 준비했다. 체제와 역량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공정(工程)부대가 없었다. 통신 시설과 방공(防空)에 필요한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 저우언라이는 지원군에게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요구했다.  
  
북한의 물자 지원 기대는 어림없어
 
조선 철도 군사관리 총국장 류쥐잉(왼쪽)과 부국장 김황일. 1952년 봄, 평안북도 정주. [사진 김명호]

조선 철도 군사관리 총국장 류쥐잉(왼쪽)과 부국장 김황일. 1952년 봄, 평안북도 정주. [사진 김명호]

이유가 있었다. 항일전쟁 시절 중공이 지휘하는 8로군이나신4군은 일본군에게 노획한 무기와 식량에 의존했다. 주민들의 지원도 만만치 않았다. 국·공전쟁 시절에도 국민당 군의 창고만 털면 만사해결이었다. 항미원조는 경우가 달랐다. 북한의 물자 지원은 어림도 없었다. 자신들의 의식주도 해결 못 할 형편이었다. 수십만, 많을 때는 백만에 가까운 중국지원군은 필수품을 본국에 의존했다. 전쟁이 계속되자 수송문제가 심각해졌다.
 
1950년 10월 말, 유엔군을 기습한 1차 공세는 중국 국경선에서 90㎞ 떨어진 곳이었다. 10일 후 청천강 연변에 도달했을 때는 170㎞로 늘어났다. 수송 선이 길어지고 탄약과 양식이 떨어지다 보니 작전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2차 공세에서 중국은 휘황찬란한 전적을 거뒀다고 자화자찬했지만, 후근 공작의 허술함이 드러났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철도가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차량 2천여대를 동원했지만, 동북에서 보낸 보급품의 75%가 중도에 잿더미로 변했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51년 1월 22일부터 8일간 선양(瀋陽)에서 지원군 후근공작회의가 열렸다. 저우언라이도 군사위원회 대표들과 참석했다. 군사 물자 수송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말석에 앉아있던 30대 초반의 청년이 손을 들었다. “허락해 주시면 5분만 발언하겠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은 리푸춘(李富春·이부춘)에게 눈길을 줬다. 동북 인민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리푸춘은 청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지원군 보급물자 수송을 담당한 선양 철도국장류쥐잉(劉居英·유거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쥐잉은 베이징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중공 지하당원 출신이었다. 총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총리께 토로하고자 한다. 철로 변의 역무원과 철도병 전사들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미군의 맹폭 속에서 선혈 뿌리며 지원군과 소통했다. 부상과 사망자가 그칠 날이 없었다. 생존자들의 가슴에도 피멍울이 맺혔다. 지금 미군은 지원군의 목을 조르는 교살전(絞殺戰)에 돌입했다. 우리는 인력과 장비, 고사포를 요구한다. 소원이 이뤄지면 목숨을 걸고 폭격으로 단절된 철교와 철도, 교량을 보수해서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 그럴 자신이 있다.” 류쥐잉의 발언은 45분간 계속됐다. 저우언라이는 막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내용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류쥐잉이 착석하자 즉석에서 결정했다. “류쥐잉을 지원군 철도운수사령관에 임명한다. 고사포부대 3개사단을 운수사령부에 파견한다. 폭격에 끄떡없는 강철같은 수송라인을 구축해라.”
 
베이징에 도착한 홍쉐즈는저우언라이와 함께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는후근사령부 설립에 동의했다. 펑더화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후근사령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물색해라. 나와 저우언라이는 의견이 없다. 직접 임명해라.” 펑더화이는 기분이 좋았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홍쉐즈에게후근사령관을 제의했다. “현대 전쟁은 하늘, 땅, 바다가 연출하는 입체전이다. 전방과 후방이 모두 전쟁터다. 앞으로 전방은 내가 맡을 테니, 후방은 네가 책임져라.”
 
5월 중순, 류쥐잉은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보낸 전문을 받았다. 항미원조에 참전하라는 내용이었다. 보직이 “중·조 연합철도 운수사령부 부사령관, 조선철도 군사관리총국 국장 겸 정치위원, 중·조 전방철도 운수사령관 겸 정치위원” 등 거창했다.
 
류쥐잉은 당황했다. 경력이나 자질이 뛰어난 선배들이 많았다. 조선철도 군사관리총국 부국장에 임명된 북한 인민군 중장 김황일도 군사철도 전문가였다. 펑더화이에게 호소했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도 일천합니다.” 펑더화이는 화를 냈다. “군사위원회가 심사숙고했다. 변동은 있을 수 없다.” 류쥐잉을 파격적으로 기용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젊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직접 설득했다. “전쟁은 모험이 필요한 특수상황이다. 우리 시야에서 먼 곳에 있는 젊은이들을 발굴해서, 단련시키고 시험할 기회다. 류쥐잉이 임무를 수행하리라 확신한다.”
  
철로 7m마다 폭탄 한 개 떨어진 셈
 
조선 철도 군사관리 총국 주관하에 공중폭격으로 파괴된 철로를 보수하는 모습. [사진 김명호]

조선 철도 군사관리 총국 주관하에 공중폭격으로 파괴된 철로를 보수하는 모습. [사진 김명호]

류쥐잉은 1954년 4월까지 3년간 보직을 수행했다. 그간 조선철도 군사관리총국 관할 구역에 출동한 미 공군기가 연 5만 9000대였다. 투하한 폭탄이 19만여 발에 달했다. 철로 7m에 한 개씩 투하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영국 본토에 투하한 폭탄의 1.5배였다. 교량 1606개가 절단 나고, 열차 1058량이 고철로 변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류쥐잉은 책 한 권으로 엮어도 모자랄 솜씨를 발휘했다. 수송이 원만해지고 미국도 교살전 실패를 인정했다.
 
6·25전쟁 관련 자료나 연구서적에서류쥐잉의 이름은 찾기 어렵다. 중국지원군 제 1부사령관과 사령관 대리를 역임했던 천껑(陳賡·진갱)은 1937년부터 일기를 썼다. 1952년 4월 9일 일기는 55자였다. “류쥐잉의 운수 정황 보고를 청취했다. 엄중한 공중폭격과 봉쇄하에서 우리의 공급은 차질이 없다. 이건 기적이다. 이런 경험을 깊이 새기며 연구해야 한다.”
 
개국대장천껑은 사람 보는 눈이 밝았다. 정전협정 이후 자신이 원장인 하얼빈 공정학원 부원장으로 류쥐잉을 추천했다. 류쥐잉은 천껑 사후에도 6년간 원장과 당 서기직을 겸임했다.  <계속>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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