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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딸처럼 챙긴 프리마돈나, 폴린의 특별한 아름다움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5)

폴린 비아르도. 한 시대를 주름잡은 오페라 가수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폴린 비아르도. 한 시대를 주름잡은 오페라 가수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로 다른 성향을 가졌기에 쇼팽과 상드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 사람, 예외적 인물이 있었는데 그녀는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 결혼 전 성은 Garcia)였다. 그녀는 메조소프라노로 당대를 풍미한 오페라 가수였다. 쇼팽과 상드는 그녀를 딸처럼 극진히 대했다. 
 
스페인계 폴린의 집안은 아버지부터, 어머니, 오빠, 언니 전부 유명한 성악가였다. 아버지는 유명한 오페라작곡가 로시니의 친구로서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할 때 그를 위한 배역을 특별히 만들었을 정도였다. 특히 폴린의 13세 위 언니 마리아는 미녀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마리아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28세에 무대 인생의 정점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 폴린은 피아노에도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교육을 맡았던 그녀의 엄마는 막내딸에게 성악에 몰두하도록 유도했다. 폴린은 피아노를 접는 것이 슬펐지만,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개미라는 별명에 걸맞은 부지런한 그녀의 습득은 빨랐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에너지, 깊은 탐구심, 사교적이고 밝은 성격을 가졌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기 절제, 침착함 그리고 지적이고 귀족적인 풍모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숙하고 영리했던 그녀는 6살에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가 가능했고, 뒤에 독일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까지 습득했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사고는 폴린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폴린은 어린 나이에 전문적인 성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오페라 가수로 가는 그녀 앞에 큰 장애가 있었다. 그녀의 외모였다. 당시 극장 무대는 전통적인 미인을 원했는데 그녀는 언니와 달리 그 기준에 턱없이 못 미쳤다.
 
크고 검은 눈은 튀어나와 있었는데 큰 눈꺼풀이 반쯤 덮고 있었다. 긴 목에 턱은 짧았다. 엄청 큰 입은 열 때마다 유난히도 많은 치아를 드러냈고 입술은 아주 두껍고 컸다. 노래할 때는 거의 입만 보였다. 누가 보아도 무대 위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외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대에서 내뿜는 열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폴린 비아르도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 쇼팽. 모리스 상드 스케치. 1844. [사진 송동섭]

 
그녀의 자세는 위엄 있고 우아했다. 늘씬하고 비율 좋은 몸매는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했다. 윤기 나는 까만 머릿결에 안색은 밝고 부드러웠고 건강미가 있었다. 지긋이 바라볼 때는 지성미도 돋보였다. 콘트랄토에서 소프라노까지 커버하는 넓은 음역을 가진 그녀가 유려한 벨칸토 창법으로 극적인 연기를 할 때 관객은 혼을 빼앗겼다. 폴린은 금방 언니의 부재를 잊게 하며 당대의 최고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
 
그녀에 대해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그녀는 못생겼다. 하지만 귀족적으로 못생겼다. 거의 아름답다고 할 정도이다.”라고 했고 당대의 유명한 화가 아리 셰페르(Ary Scheffer)는 “그녀는 진짜 못생겼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라고 했다. 아리 셰페르는 죽기 직전에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했다.
 
조르주 상드는 17세의 폴린의 노래를 듣고는 그녀의 목소리와 재능에 깊이 빠졌다. 한 살롱에서 그녀를 소개받은 이후 둘은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상드는 "그녀는 내가 열정적으로 오직 좋아하기만 한 유일한 여성이다. 그녀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재이다.”라고 했다.
 
시인 뮈세도 노래를 듣고 그녀에게 매료되었는데, 그녀를 쫓아다니다 청혼까지 했다. 뮈세와 한때 사귀었던 상드는 그 소식을 듣고 그 청혼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상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 이탈리앙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고 부유했던 루이 비아르도를 이어주어 둘이 결혼하게 했다. 루이와 폴린은 상드와 쇼팽이 마련한 저녁 자리의 단골이었으므로 둘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루이는 18세의 폴린보다 21살 위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훨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 후, 그녀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그녀에게 헌신했고, 그의 도움을 받은 폴린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오페라 가수로 성공적인 경력을 이끌어 갔다.
 
쇼팽도 폴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쇼팽은 그녀를 보자마자 활력이 생겨 기침을 멈추고, 그녀와 함께 음악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피아노를 잘 다루었던 그녀와 쇼팽은 이중주도 즐겼고 서로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았다. 폴린 부부는 노앙의 집도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 3 거장 – 쇼팽, 상드, 들라크루아 – 에 둘러싸인 폴린은 창작과 예술의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폴린의 남편 루이 비아르도. 그는 작가에 평론가, 음악감독이었다. 에밀 라살 드로잉. 1840년.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폴린은 쇼팽과 상의하고 그의 마주르카를 성악곡으로 편곡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멜로디를 쇼팽에게 소개하여 그가 스페인 춤곡 볼레로를 작곡하도록 도왔다. 특히 1841년, 폴린이 해외 공연을 갈 때 막 출산한 아이를 노앙에 남겨 놓았었는데, 병아리처럼 ‘삐악삐악’하는 아기 루이제트가 예뻐서 쇼팽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는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쇼팽은 아이를 위해 자장가도 작곡했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와 아이를 다시 데려갔을 때는 큰 허전함을 남겼다. 상드는 끊임없이 폴린의 재능과 성실한 자세, 특히 침착한 태도를 칭찬하며 딸 솔랑주와 비교하였다.
 
폴린의 남편이 없을 때면 상드의 아들 모리스가 2살 위의 폴린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치근거렸다. 상드와 쇼팽, 모리스까지 모두의 관심과 사랑이 폴린에게 쏠리자 솔랑주는 더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솔랑주는 마음의 상처를 숨기며 “나도 착한 아이가 될 거예요” 하며 엄마 앞에서 다짐했다. 하지만 엄마 사랑을 갈구하는 사춘기의 딸이 느끼는 좌절감과 열등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상드가 폴린과 다정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며 뒤를 따르던 솔랑주는 정원의 꽃을 막대로 내리쳤다.
 
쇼팽과 상드, 두 사람 모두와 친했기에 나중에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 폴린은 누구보다 아쉬워했다. 많은 당대의 음악가들도 폴린에게 매료되어 그녀를 위한 곡을 썼다. 그녀에게 곡을 헌정한 작곡가들에는, 멘델스존, 구노, 베를리오즈, 까미유 생상,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슈만, 글룩, 요하네스 브람스, 바그너을 망라한다.
 
폴린은 여러 곡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오페라도 있다.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그녀가 작곡한 3편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 폴린을 사랑한 사람 중에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특별했다.
 
그는 귀족 출신에 파란 눈과 체스트넷 색의 머릿결에 잘 생기고 키도 컸다. 지적이고 점잖았으며 친절한 그는 40년간 폴린에게 지순한 사랑을 바쳤다. 모파상은 폴린과 투르게네프의 관계를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라고 했다.
 

이반 투르게네프. 일리야 레핀의 유화. 1874년. Tretyakov Gallery, 모스크바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버지와 아들’, ‘첫사랑’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 (Ivan Turgenev, 1818-1883)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의 3대 소설가로 꼽히는데, 당대 서유럽에서는 다른 두 사람보다 더 잘 알려졌고 더 높이 인정받았다. 그것은 그의 문체가 세련되고 유려했으며 밝고 맑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서유럽에 살며 서유럽의 여러 작가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투르게네프는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의 재산 대부분은 외가에서 온 것이었다. 사나운 성품의 어머니 아래 그는 매를 맞으며 자랐기 때문인지 그는 소심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에서 공부한 후 1841년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짧게 관료생활도 했다. 그런 그가 서유럽으로 옮겨간 것은 폴린 때문이었다.
 
1843년, 폴린이 처음 러시아 무대에 섰을 때, 항상 수줍은 듯 조용했던 투르게네프는 3살 아래의 그녀에게 푹 빠졌다. 그는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여러 추종자 중 하나로 가벼이 여겼지만, 그에게 그녀는 숙명적이고 절대적인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끊임없이 존경과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2년 후 투르게네프는 공직을 버리고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 있는 폴린 가까이 갔다. 그는 계속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 가족이 정치적 이유로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갔을 때 그도 바덴바덴에서 그녀의 집 근처에 살았다.
 
다시 폴린이 런던과 파리 인근의 부지발을 옮겨 다닐 때도 그는 폴린의 이웃에 살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 바라보았다. 떨어져 있을 때면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다. 지금 폴린은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가 사랑한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그는 폴린의 그늘에 있었다.
 

폴린 비아르도의 살롱. 오르간이 설치된 그녀의 살롱은 한때 문화,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둘은 연인처럼, 때로는 가까웠다, 때로는 토라져서 멀어지기도 했다. 애매한 관계 속에서도 대체로 폴린과 남편 루이, 그리고 아이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그를 대했다. 그는 루이와 문학에 관해 토론도 했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 폴린의 네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대하며 직접 가르치고 돌보기도 했다.

 
폴린은 4개월 간격으로 두 남자를 보냈다. 루이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투르게네프가 척추 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다 생을 마감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끝없이 혼자인 것처럼’ 느꼈다.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폴린에게 남기고 떠났다.
 
사람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 때문에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은 좋은 인성이 될 수도 있고 뛰어난 재능이 될 수도 있다.
 
쇼팽의 마주르카 중에는 작품번호 33-2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 곡을 폴린 비아르도가 노래로 만든 것이 ‘나를 사랑해줘요(Aime-Moi)’이다. 이 곡처럼 폴린의 심성도 밝고 맑았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다음 편은 쇼팽의 병과 사후에 보존된 그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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