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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챔피언]제품 1만개 20억번 테스트, 시장 출시 100개뿐

세계 1위여도 히든챔피언은 '닥치고 R&D' 

독일 쾰른에 있는 이구스 본사에선 1년간 약 20억회의 테스트가 이뤄진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독일 쾰른에 있는 이구스 본사에선 1년간 약 20억회의 테스트가 이뤄진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여기도 테스트, 저기도 테스트 시설입니다. 저쪽까지 다 입니다.”
 지난 8월 20일 독일 쾰른에 있는 고성능 플라스틱 소재 기업 이구스(igus) 본사. 공장 시설을 보여주겠다는 게하드 바우스 부사장을 따라나섰는데 걸어도 걸어도 생산설비는 나오지 않고 테스트 공간만 이어졌다. 코스트코 매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 창고형태 공장 부지 절반가량은 연구개발(R&D) 및 테스트 설비로 채워져 있었다. 

[히든챔피언의 비밀]
분데스리가식 경쟁, ‘소부장 강국’ 독일의 비결

 
넓이만 3800㎡. 축구장(7200㎡) 절반보다 큰 규모다. 이곳에선 매년 평균 1만5000종의 테스트가 20억번 이상 이뤄진다. 바우스 부사장은 “세계 최고 축구 선수들이 겨루는 분데스리가를 보면 하부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소수 선수만 '꿈의 무대'인 1부리그에서 뛰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며 "우리 제품도 단계별 혹독한 테스트를 거친 끝에 살아남은 100여종만 시장에 나온다”고 설명했다.
게하드 바우스(오른쪽) 이구스 부사장과 토비아스 보겔 마케팅 부문장이 이구스가 만드는 플라스틱 베어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게하드 바우스(오른쪽) 이구스 부사장과 토비아스 보겔 마케팅 부문장이 이구스가 만드는 플라스틱 베어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이구스는 1964년 권터 블라제가 창업한 이후 금속이 아닌 고성능 플라스틱으로 베어링, 체인을 만들어 이 분야 세계 1위에 오른 기업이다. 기름을 칠할 필요가 없는 이른바 무급유(oil free) 베어링으로 불리는 드라이 테크 베어링이 대표상품이다. 2012년 ‘히든챔피언’(세계 1~3위 점유율 가진 강소기업)에 선정됐으며 2016년 독일 경제주간지 ‘비르트샤프츠보헤’(WirtschaftsWoche)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38위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매출은 7억4800만 유로(9811억여원)다. 독보적 기술력을 갖춘 회사지만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사업확장도, 마케팅도 아닌 R&D와 테스트였다. 
독일기업 전문가인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은 이구스처럼 “잘하는 걸 더 잘하자”는 성향을 히든챔피언의 공통된 특징으로 꼽았다. 한 분야에서 이미 최고 기술력을 가졌더라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닥치고 R&D’ 성향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얘기다. 
 
조 원장은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하게 되고 그걸 다시 해당 영역에서 응용해 제품을 변화시켜 경쟁자들의 추격을 따돌린다”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R&D와 테스트에 있다”고 설명했다.

'R&D 반, 생산 반' 이구스 공장 

 실제 이구스 관계자들도 성공비결을 R&D에 기반을 둔 테스트 중심 경영을 첫손에 꼽았다. 이구스는 코카콜라가 최적의 비율로 재료를 섞어서 콜라를 만들듯 기름을 안 쳐도 되는 윤활 성분,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강화 성분 등을 사다가 기본 플라스틱과 다양한 비율로 섞어 제품을 뽑아낸다. 
 
고객이 온도, 운동방향, 강도 등 부품에 필요한 조건을 말하면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적절히 플라스틱을 혼합해 원하는 특성의 부품을 뽑아낸단 얘기다. R&D와 테스트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구조다. 토비아스 포겔 이구스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우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이 아니라 고객이 필요한 제품을 만든다”며 “끊임없이 기존 제품을 바꿔 고객이 원하는 성능을 구현한다”고 말했다.
독일 쾰른 소재 이구스 공장에 자율주행선반이 물건을 나르고 있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독일 쾰른 소재 이구스 공장에 자율주행선반이 물건을 나르고 있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이구스 테스트 시설에선 말 그대로 다종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섭씨 200도 이상부터 영하에 이르기까지 극한의 온도를 견디는 실험, 직선·회전 및 3차원 운동 등 제각각 방향으로 진행되는 운동실험, 물 또는 화학성분이 많은 환경에서 1년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보는 부식실험 등 다양했다. 이를 통과한 플라스틱 부품은 자동차, 크레인, 공작기계, 농기계, 의료기기, 가구, 로봇에 이르기까지 산업 거의 전 분야에 쓰인다.
 
 독일기업 전문가인 김광희 중소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독일에는 아주 작은 분야이지만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많다”며“동판을 1㎜, 2㎜ 두께로 아주 얇게 잘라내는 기업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기술 자체로 이미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베낄 게 없고 그래서 자신과 경쟁하는 셈”이라며“그들에겐 R&D와 테스트가 생존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한해 연구개발투자비 134조원

주요 국가 연구개발비 투자 현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요 국가 연구개발비 투자 현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히든챔피언’ 개념을 만든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말했듯이 기술혁신→글로벌화→경쟁력확보→기술혁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독일 강소기업의 대표적인 성공 방정식이다. 이는 수치로도 일정 부분 확인된다. 중견기업학회장인 이홍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가 작성한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기준 설정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히든챔피언 기업 1307곳의 수출 비율은 평균 62%에 달한다. 또 독일의 2017년 R&D 투자 규모는 1121억8600만 달러(약 134조2866억원, 2019 주요과학기술통계 100선 기준)에 달한다. 
 
같은해 우리나라 투자액은 696억9900만 달러(83조 4645억원)였다. 이홍 교수는 “대부분 대기업 하청업체로 수직계열화돼 있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문화가 강했던 국내 중견기업과 달리 독일 소재·부품 강소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경쟁하고 있다”며 “자체 R&D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독일 베텐베르그에 있는 피브이에이 테플라(PVA TePla)는 반도체 웨이퍼 소재 제조설비, 비파괴 검사장비, 플라즈마 세척기 제조 분야 ‘히든챔피언’이다. 이 회사도 기술혁신을 통한 글로벌화로 히든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매출은 1억2500만 유로(1640억여원)인데 이중 절반이 아시아 지역 매출이다. 나머지 40%는 유럽 지역 매출이다.  
PVA테플라의 생산설비 [사진 PVA테플라]

PVA테플라의 생산설비 [사진 PVA테플라]

아르민 스테거 피브이에이 테플라 상품관리 책임자는 독일 강소기업의 경쟁력이 R&D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은 프라운 호퍼 연구소, 막스 플랑크 연구소 등 다양한 유명 연구기관을 보유하고 있고 우리를 포함해 중소기업이 이들과 긴밀하게 협력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체 연구소도 세워 교류한다”고 설명했다.
쾰른(독일)=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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