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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콜베 신부는 왜 남을 대신해 죽었을까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지난달 23일 폴란드 쳉스트호바에서 버스를 타고 아우슈비츠로 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았던 독일군의 수용소다. 버스를 내리자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로 붐볐다. 현지 안내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참관 수업차 찾는 학생은 폴란드인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독일인이다”고 말했다. 그날은 이스라엘에서 온 유대인 학생들도 꽤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들이 철로 옆에 서 있다. 이들 중 75%는 곧장 독가스실로 이동해 학살됐다. 유대인들은 그곳이 샤워실인 줄 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들이 철로 옆에 서 있다. 이들 중 75%는 곧장 독가스실로 이동해 학살됐다. 유대인들은 그곳이 샤워실인 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학살된 유대인만 무려 110만 명이었다. 그다음이 폴란드인(약 15만 명)과 집시(2만3000명), 소련군 포로(1만5000명)와 기타 포로(2만5000명) 순이다. 유대인 학살 수용소가 독일이 아니라 폴란드 땅에 세워진 건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1300년대 말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자 근거 없이 유대인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유럽 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폴란드로 왔다. 당시 폴란드에는 흑사병도 없었고, 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유대인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폴란드에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게 됐다. 안내인은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국가에 독일군이 학살 수용소를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섰다. 유대인과 전쟁 포로가 수용됐던 막사 28개 동이 보였다. 바깥에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2중으로 처져 있었다. 막사 안에는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유품이 참담하게 전시돼 있었다. 그들이 남긴 머리카락 3t과 죽음 직전에 벗었던 신발 2만 켤레가 유리관 너머에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방문객들은 나치의 잔인함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전경. 이중 철조망에는 전류가 흘렀다. 철조망 너머는 당시 독일군이 썼던 행정 건물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전경. 이중 철조망에는 전류가 흘렀다. 철조망 너머는 당시 독일군이 썼던 행정 건물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들. 수용소는 보관 중인 신발 10만 켤레 중 2만 켤레를 전시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들. 수용소는 보관 중인 신발 10만 켤레 중 2만 켤레를 전시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머리카락이다. 전시 중인 머리카락의 무게가 무려 3t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머리카락이다. 전시 중인 머리카락의 무게가 무려 3t이다.

 
당시 기차가 유대인들을 싣고 수용소로 오면 독일군은 여성과 어린아이, 노인과 장애인 등 75%를 추려서 먼저 독가스실로 보냈다. 나머지 25%는 수용소에서 두세 달 동안 강제 노동을 하다가 몸무게가 20~30㎏이 된 상태에서 죽임을 당했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독일군은 탈옥수와 같은 막사를 쓰는 사람 중 10명을 무작위로 뽑았다. 탈옥수 발생 시 다른 수감자 10명을 굶겨 죽이는 게 수용소의 규칙이었다. 독일군의 지목을 받은 프란치스코 가즈브니체크는 “저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 죽기 싫다”며 울부짖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수감자 한 사람이 “나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며 자진해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바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1894~1941) 신부다.  
 
콜베 신부가 독일군 장교에게 자신은 아내와 자식이 없으니 아사형에 지명된 수감자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콜베기념관]

콜베 신부가 독일군 장교에게 자신은 아내와 자식이 없으니 아사형에 지명된 수감자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콜베기념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만 무려 110만 명이다. 독일군은 퇴각하면서 1,2,3 수용소 중 2수용소와 3수용소는 증거 인멸을 위해 파괴했다. 1수용소는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진주해 서둘러 퇴각하느라 없애지 못했다. 1수용소가 현재 아우슈비츠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만 무려 110만 명이다. 독일군은 퇴각하면서 1,2,3 수용소 중 2수용소와 3수용소는 증거 인멸을 위해 파괴했다. 1수용소는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진주해 서둘러 퇴각하느라 없애지 못했다. 1수용소가 현재 아우슈비츠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놓았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놓았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

 
콜베 신부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폴란드인이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인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 난민을 위한 쉼터를 꾸렸다. 또 『성모 기사』라는 잡지를 창간해 100만 부씩 발행하며 폴란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정치범이 돼 1941년 독일 비밀경찰에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끌려왔다.  
 
나는 11동 수용소로 갔다. 그곳에 콜베 신부가 굶어 죽은 아사 감방이 있었다. 아사 감방의 위치는 지하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천장에 붙은 노란 백열등만 힘겹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콜베 신부의 수인 번호는 16670. 그걸 가슴에 단 채 콜베 신부는 이곳에서 이웃을 대신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 나는 감방의 창살 앞에서 눈을 감았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남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놓게 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하에 있는 아사 감방. 이곳에서 콜베 신부는 최후를 맞이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하에 있는 아사 감방. 이곳에서 콜베 신부는 최후를 맞이했다.

콜베 신부가 독극물 페놀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둔 아사 감방.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을 찾아 오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콜베 신부가 독극물 페놀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둔 아사 감방.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을 찾아 오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감방의 간수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아사 감방의 수감자들은 묵주 기도와 성모 찬가를 바치다 죽어갔다.’ “당신은 내일 낙원에 있을 겁니다”라며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하던 콜베 신부는 2주가 지나도 생존했다. 결국 독일군은 콜베 신부에게 독극물인 페놀을 주사했다. 이튿날 콜베 신부의 시신은 수용소 안에서 소각됐다.  
 
예수는 말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 나는 콜베 신부의 아사 감방에서 ‘콜베의 십자가’를 보았다. 그건 예수가 세상과 인류를 위해 통과했던 십자가다. 콜베 신부 역시 그 십자가를 통과했다.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으며 말이다. 아사 감방 앞에서 묵상하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 신부는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콜베 신부님은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며 그걸 실천하셨다. 그의 철저한 사랑을 보며 마음이 울컥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콜베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의 모습이다. 독일군은 수감자의 치아 검사를 통해 건강 여부를 확인하고, 노동력이 부실한 사람들부터 독가스실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의 모습이다. 독일군은 수감자의 치아 검사를 통해 건강 여부를 확인하고, 노동력이 부실한 사람들부터 독가스실로 보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총살 현장이다.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추모하는 꽃을 갖다 놓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총살 현장이다.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추모하는 꽃을 갖다 놓았다.

 
콜베 신부로 인해 목숨을 건진 가조브니체크는 훗날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수감자를 위해 죽겠다고 나선 사람은 콜베 신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했다. 가조브니체크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났고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까지 매년 콜베 신부의 기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와 꽃을 바쳤다.  
 
아우슈비츠(폴란드)=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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