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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TV 훔쳐보던 동독 주민, 부정선거 항의 대규모 시위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1>

1989년 10월 23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됐다. [사진 독일연방기록청]

1989년 10월 23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됐다. [사진 독일연방기록청]

30년 전인 1989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유럽 공산주의 진영의 해체 과정이 시작됐다. 이전 40년 동안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같이 보였던 철의 장막이 빠르게 와해돼 갔다.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그에 따른 독일 통일 과정은 정점을 이루었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동독의 5개 주는 신연방주로 통일 독일에 편입됐다.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와 중앙SUNDAY는 89년 동독에서 전개됐던 평화혁명과 이듬해 90년 독일 통일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70년대 서독 동방정책 덕 희망 불씨
니콜라이교회 등서 평화예배 시작

89년 여름 열차편 서독행 난민 급증
동독 역 지날 땐 구경 인파 몰리기도

“우리는 시민이다” 라이프치히 시위
곪아터진 현실에 분노 50만 행렬

독일 통일 29주년인 지난 3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직 통일은 완전하지 않으며 여전히 진행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킬에서 열린 통일의 날 기념식에서 메르켈 총리는 “통일 완수는 모든 독일인에게 적용되는 끊임없는 임무”라고 말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로 본격화한 동서 통일 과정이 과거형이 아닌 미래형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당시로 돌아가 보자. 베를린장벽 붕괴 한 달 전인 89년 10월  대규모 평화시위와 함께 동독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소식은 매일 밤 서독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독에서의 저항은 즉흥적으로 분출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실망감의 결과였다.
 
동독은 초기부터 언제나 서독과의 강력한 체제경쟁에 노출되어 있었다. 서로 비교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체제를 직접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2차 대전 종전으로 분단이 시작되었던 45년부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61년 8월 13일까지 25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한 반면에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매우 드물었다. ‘공화국 탈출자’들 중 수백 명의 동독 주민들은 경계를 넘다가 희생당했다.
  
베를린장벽, 쌓은 지 28년 만에 붕괴  
 
70년대 동방정책이 시작되면서 동서독 관계가 서서히 유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희망이 생겨났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와 번영을 향한 동독 주민들의 희망은 충족되지 못했다. 에리히 호네커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 시절의 슬로건이었던 ‘서독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서독을 추월한다’는 목표는 공허한 것으로 드러났다.
 
동독인들은 매일 저녁 공식적으로는 시청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보고 있었던 서독 TV를 통해 동독 체제와 번영하는 서독 간의 차이를 알고 있었으며 서독 사회가 누리고 있던 자유를 목도하고 있었다. 동독 정보부의 감시 대상이었지만 어느 정도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었던 개신교회와 환경단체들이 서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목사들은 자신들의 관할하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 평화예배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후에 동독에서 대규모 시위의 출발점이 됐다.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교회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라이너 에펠만이나 프리드리히 쇼를렘머와 같은 목사는 동독 내에서뿐만 아니라 동독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동독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로 알려지면서 동독 정권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80년대에는 동독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으며, 이들은 자동차에 작은 천을 달아서 저항의 뜻을 표시했고 서로 용기를 북돋웠다. 이러한 그룹들은 오랫동안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동독의 국가 보위부인 슈타지는 89년 초 기준으로 160개 지역별 그룹에 2500명의 활동가들이 있으며 그중 단지 60명 만이 핵심적인 반정부 인사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1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89년 평화예배를 본 후 대규모 시위대가 출발했던 거점 역할을 했다. 2 동독의 대규모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우표. 3 동독 환경운동가들이 제작한 인쇄물. [사진 젤리거]

1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89년 평화예배를 본 후 대규모 시위대가 출발했던 거점 역할을 했다. 2 동독의 대규모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우표. 3 동독 환경운동가들이 제작한 인쇄물. [사진 젤리거]

89년 5월 동독에서는 지방선거가 실시됐는데 투표율이 거의 100%에 달했으며 정권에서 제시한 투표용지에 대한 찬성률 또한 그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독립적인 선거 감시인으로 참가했던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이곳저곳에서 자행된 선거 조작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라이프치히와 같은 도시에서는 선거 조작에 대한 소규모의 저항이 시작됐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는 더욱 커졌고 급기야는 월요평화예배의 형태로 확대됐다. 이로써 동독 정권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89년 여름이 되자 헝가리가 국경을 열면서 많은 수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은 같은 사회주의권 인근 국가들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수천 명의 동독 주민들이 처음으로 헝가리를 거쳐서 서독으로 탈출하자 동독 정권은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폴란드 바르샤바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에 몰려들었다. 양 대사관 마당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방관할 수 없는 시점이 되자 호네커는 마침내 동독 난민들이 열차를 이용해서 동독 영토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넘어가는 방식에 동의했다. 통과하는 동독 도시들의 역에서는 수백 또는 수천 명의 주민이 지나가는 열차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스스로 열차에 올라탈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주민들도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드레스덴과 같은 도시에서는 경찰이 역 주변에 나온 시민들에 과잉 대응을 하면서 첫 번째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접경지역에 위치한 플라우엔에서는 1만5000명의 시민이 운집해 경찰의 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동독에서는 처음으로 반체제그룹이 출범했다. 시민운동가 배르벨 볼라이, 볼프강 템플린, 울리케 포페, 게르트 포페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처음에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했던 라이프치히의 월요시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천 명 단위로 늘어났다. 시위를 시작하는 시간이 오후 5시였는데, 이는 시민들이 퇴근한 이후였으며, 가게는 아직 닫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에 시내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였다. 또한 같은 시간 SED 당원들은 직장별로 열리는 당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은 시위하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다.
  
‘번영하는 국가, 동독’ 공식 선전에도 …
 
시위 참가자들이 외쳤던 ‘우리는 시민이다’는 구호를 통해 그들은 인민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유일한 독점기구라고 자임했던 SED와의 대척점에 서게 됐다. 시위는 드레스덴·카를마르크스슈타트·할레·플라우엔·마그데부르크·로스토크·포츠담·슈베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시민들은 이전까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현재에는 무기력하게 방관하고 있는 국가에 맞서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됐다. SED 정권은 시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는커녕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민중의 배신자로 폄하하거나 시위에 관해 침묵하며 기존의 노선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
 
89년 10월에 있었던 동독 설립 40주년 기념일은 번영하는 국가, 동독이라는 공식 선전과 시위대에 의해 드러난 곪아 터진 현실 사이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 계기였다. 동독 지도부가 직장 전투조와 병사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렸지만 지역 현장에서는, 특히 시위의 중심이었던 라이프치히에서는, 신중한 대처 덕분에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시위 참가자들이 체포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같은 해 중국에서 발생했던 천안문사태와 같은 유혈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동독에는 거의 50만 명에 가까운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개입하지 않았다.  
 
지금은 권위적인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에서도 SNS를 통해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수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동독에서 평화혁명이 일어나던 당시만 해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이전에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했던 모든 시위들은 전차를 앞세워서 무력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53년 동독, 56년 헝가리, 68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81년 폴란드의 사례가 그러했다. 한국의 촛불시위는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동독의 평화혁명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동독 시민들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89년 9월 4일 라이프치히 시내에 모였던 시위 참가자들의 숫자는 1200명이었는데 10월 9일에는 이미 7만으로 불어났다. 11월이 되자 50만을 넘어섰다. 동독 사회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시위대는 처음에는 선거 조작에 관한 항의나 표현·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문구를 내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슈타지와 SED를 무력화시키자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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