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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후원, 정책 개선도 좋지만 국민의 ‘문화 사랑’이 먼저

문화예술 지원이 경영이다 <1>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세계적인 장기 불황 여파로 문화예술계도 타격을 받고 있다. 유럽 선진국들의 경우 정부지원은 제한되고 민간의 역할이 커지는 추세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문화예술 후원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다. 최근 발표된 ‘2018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에 따르면 2017년 대비 지원 건수와 지원 기업수가 각각 5.6%, 3.2%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속 가능한 예술 생태계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기업의 참여 확대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중앙 SUNDAY는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공헌에 앞장서고 있는 우수기업들을 소개한다.

예술의 생활화가 곧 시민의 교양
개인들 펀딩이 생색나게 해줘야
기업 지원,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IMF 때 주식 뺏기고 그룹서 퇴출
아내도 잃고 인생 돌이켜 보게 돼
“문화예술에 미쳐 계신 분” 소리 들어

 
“예쁘쟎아요.”

 
대답이 단호하다. 늘 보타이를 매는 이유가 뭔지 그럴싸한 이유를 댈 법도 한데, 김희근(73)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은 아무 꾸밈이 없다. 1000점 가까운 미술품을 보유한 큰손 컬렉터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포럼 회장·세종솔로이스츠 이사장·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조직위원 등을 겸하고 있는 문화예술계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다. 점잖고 고상한 ‘회장님’과의 대화가 어려울 거라 겁먹었지만, 반전이었다. 유쾌하고 매력적인 노신사의 구수한 입담엔 중독성이 있었다.

 
구로구에 있는 사옥도 감리설계·플랜트 기업의 딱딱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미술관인양 김 회장의 개인 컬렉션을 전시해 놨고, 층마다 마련된 ‘열린 도서관’에는 예술관련 서적이 빼곡하다. 임직원들은 문화예술에 ‘둘러싸여’ 일하고 있는 셈이다.

 
“제가 벽산건설 대표를 오래 했잖아요. 험한 산업에 몸담다보니 삶이 강퍅해지더군요. 직원들은 저보다 더 강퍅하고 혜택도 못받는 사람들이잖아요. 작품을 사놓으면 뭐하나요. 누가 보아줄 때 생명이 있는 거니까.”

  
“돈 벌기 보다 문화소양 기르는 직원이 예뻐”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집무실에는 백남준, 루이스 부르조아, 조지 콘도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수십점이 미술관처럼 디스플레이 되어있다. 김경빈 기자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집무실에는 백남준, 루이스 부르조아, 조지 콘도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수십점이 미술관처럼 디스플레이 되어있다. 김경빈 기자

김 회장은 본업보다 공연이나 전시, 문화예술관련 회의 참석에 더 바쁘다. 스스로 “하루 일과의 80프로가 무료봉사”라고 했고, 한 직원의 표현을 빌자면 “문화예술에 미쳐계신 분”이다. 회사 창립 40주년을 맞은 지난주에도 KIAF 조직위원으로서 행사를 치르고, 서울시향 공연에도 얼굴을 내미느라 분주했다. 인터뷰를 마치면 예술경영지원센터 회의를 하러 가야 한단다. “지인들이 미대, 음대 나온 분들이 많았어요. 나이 드니까 전시회, 음악회 한다고 도와 달라길래 왔다갔다 하다보니 이렇게 됐죠. 무슨 큰 뜻을 품은 건 아니에요.”

 
벽산그룹 창업주 2세로 태어나 혜택받고 살았지만, ‘금수저’ 인생에도 곡절이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주식을 다 뺏기고 그룹에서 쫓겨났고, 지극히 사랑했던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격적인 사업확장에서 사회공헌으로 삶의 포커스를 전향하게 된 이유다. “내가 최대주주였는데 주식을 다 뺏기고 1000억을 잃었어요. IMF에 감사한 게, 쫓겨나 일이 없으니까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된 거예요.(웃음) 집사람이 아플 때 그 사람 희망으로 자서전을 썼는데, 과거를 정리하다 보니 미래가 남더군요. 남은 인생 어떻게 살까 생각해보니, 대답이 명확했어요. 사람은 다 같아요. 가진 걸 다 주고 가야 하죠. 동물과 차이가 그거 아닌가요.”

 
그에게서는 특별한 사명감이 느껴졌다. 상류층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문화예술에 돈을 쓰도록 이끄는 것이 소임이란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열정은 유학과 사업으로 해외에 머물면서 싹텄다. “역사 깊은 나라의 부자들은 대화가 달라요. 책 얘기로 시작해 성향을 드러내고, 그와 관계된 공연 얘기를 나누더군요. 그들은 어떻게 그런 습관을 들였을까요. 우리 부자들은 아파트 옮겨다니면서 돈 벌어 좋은 핸드백 들고 다니지만, 그건 품위와 달라요. 행복과 성공에는 단계가 있어요. 인류가 사냥하고 살 땐 동물에게 공격 안 받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지만, 이제는 누가 인정해줘야 하고, 그 다음엔 존경을 받아야 하죠. 아파트로 돈 벌면 계모임에서나 칭찬하지 누가 좋아하겠어요.(웃음)”

 
전사적인 차원에서 예술후원활동에 나서는 것도 그래서다. 벽산엔지니어링은 2015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예술후원 우수기관’으로 인증받았다. 올해만 해도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꿈나무 오케스트라 활성화 사업, 경남문화예술진흥원과 함께 사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종로문화재단과 함께 어린이병원 힐링프로젝트 등을 진행중인데, 전 임직원이 참여한다. 월급의 1%를 기부하면 회사가 1%를 내는 매칭펀드 형태다. 그는 이런 식의 사회공헌이 기업에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확신했다.

 
“우리 직원이 1000명인데, 1000명이 하는 것과 혼자 하는 것은 게임이 달라요. 매출 2000억~3000억원짜리 회사가 인력을 1000명 쓰는데, 이병철 회장이 말했듯이 보통사람 데리고 와서 좋은 사람 만든다는 생각으로 고용합니다. 돈 벌어오는 직원보다 문화소양을 기르는 직원이 예뻐요. ‘문화 마일리지’를 만들어 직원들의 문화활동도 권장하는데, 생각보다 좋아하더군요. 애들도 많이 데려오고. 그런 게 보람이지, 돈 다 갖고 갈 수 없잖아요.”

 
벽산엔지니어링 임직원이 기부에 동참한 어린이병원 힐링 프로젝트. [사진 벽산엔지니어링]

벽산엔지니어링 임직원이 기부에 동참한 어린이병원 힐링 프로젝트. [사진 벽산엔지니어링]

사별한 아내의 유산으로 벽산문화재단을 세운지 10년째다. 재단 이사회에 가족은 없다. 연극 이상열, 미술 김선정, 음악 김순영 등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본인은 재원 마련에만 집중한다. 기업 후원이 약한 연극 분야에 희곡상을 제정해 공연까지 지원하고, 한국 혈통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에 큐레이션되도록 지원하는 등 창의적인 후원 방식도 돋보인다.

 
“연극이 제일 열악하잖아요. 유인촌 장관시절 연극계가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는데,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희곡이 제일 약하대요. 집을 지어도 설계가 제대로 되어야 하니까, 희곡부터 지원을 시작했죠. 미술은 배부르면서 앓는 소리하는 작가들은 안 돕습니다. 올해는 콜럼비아 이민 3세를 후원하는데, 작품을 LA카운티미술관에 기증하게 했어요. 해외 유명미술관에 우리 작가가 큐레이션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메세나계의 큰손으로서 예술 생태계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정부 지원만 많고 순수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가 없으니 세금만 축내게 되고, 진정한 예술의 생활화는 요원하다는 쓴소리다. “세계에 우리나라 같은 데가 없어요. 오케스트라, 오페라, 미술관 전부 다 나랏돈을 쓰잖아요. 국민 세금으로 나라가 생색내는 건데, 나쁜 겁니다. 몇 년 전 런던에 윤석화씨가 만든 뮤지컬 ‘톱햇’을 보러갔는데, 화요일인데 꽉 찼더군요. 이렇게 유명한거냐 물으니 영국인들은 색다른 뮤지컬이라면 지방에서 돈 모아서 버스 타고 보러 온대요. 그게 예술 사랑이죠. 우린 회사 대표들도 공짜표 없으면 안가잖아요.”

  
‘굿 시티즌’ 양성이 예술 융성으로 이어져

 
그가 주장하는 예술의 생활화는 교양과 동의어다. 좋은 시민을 양성해 내는 것이 곧 예술이 풍성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다행히 어제 KIAF에 김정숙 여사가 와서 그림 4점을 사가셨어요. 윗사람들이 먼저 해야 동기부여가 되는 거죠. 문화부 예산이 많아지는 게 문화강국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화는 기부 얘기하기 전에 정신차려야 되요. 집 근처 산책을 하다보면 등산로에 쓰레기가 많아요. 내가 줍고 다니니 집에서 장갑과 집게를 사주더군요. 그런 게 문화죠.”

 
예술 후원 활성화도 마찬가지다. 세제혜택 같은 정책 개선도 필요하지만 국민의 ‘펀더멘털’이 먼저라고 했다. 예술은 결국 개인 후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정부·기업·개인 돈이 다 필요한데, 개인 후원은 경기가 나빠도 흔들리지 않거든요. 개개인의 펀딩이 생색나게 해주고, 기부문화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는 노력을 해야 해요. 기업들이 일을 벌리는 데 의의를 두는데, 돈 있으면 일 벌리는 건 쉽죠. 관건은 지속가능성이에요. 나라가 건강해지고 사람들이 굿 시티즌이 되도록 펀더멘털에 돈을 써야 합니다. 마흔 전에 CEO가 된 사람들의 글로벌 모임이 있거든요. 축복받은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이런 얘기를 해주고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가는 게 제 미션이라 생각해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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