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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을 빼앗은 사람? 쇼팽을 경계한 상드의 아들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4)

조르주 상드의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주. 메리엔느 낭시의 드로잉. 상드가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에 있을 때의 그림. 1836년. 수채화. Musee de la Vie Romantique 소장.

조르주 상드의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주. 메리엔느 낭시의 드로잉. 상드가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에 있을 때의 그림. 1836년. 수채화. Musee de la Vie Romantique 소장.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가? 부모는 자기를 닮아서 그 자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자기를 너무 닮으면 싫어한다. 엄마와 딸의 전형적인 관계는, 엄마와 아들, 혹은 아빠와 딸의 전형적인 모습보다 좀 복잡하다.
 
성공한 작가 조르주 상드는 아량과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상드라는 큰 나무 가까이에 있었던 많은 사람 중에 나무가 주는, 과실, 그늘의 시원함, 바람막이 등의 혜택보다 그 나무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아마도 유일한 사람이 딸 솔랑주(Solange, 1828~1899)였다.
 

자신의 나쁜점을 닮은 딸이 싫었던 상드

활기차고 영리했던 솔랑주였다. 건강한 솔랑주는 상드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을 타고 노앙의 들판을 누볐다. 마리 다구는 어린 솔랑주가 요정처럼 예뻤다고 했지만 상드의 눈에 딸은 못마땅하게만 보였다. 상드는 솔랑즈가 이기주의자이며 파렴치한 자신을 그대로 닮았다고 했다. 상드는 어릴 때부터 딸의 기를 죽였다. 솔랑주의 삶은 대체로 불행했는데 거기에는 엄마인 상드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
 
아들 모리스(Maurice, 1823~1889)의 탄생은 신혼 부부, 카지미르와 상드에게 축복이었다. 그러나 모리스는 허약했다. 상드는 그런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아들에게 큰 애정을 쏟았다. 모리스는 상드에게서 어릴 때부터 모성애 강한 보살핌을 받았다. 잘 때도 아이는 엄마를 꼭 안고 잤다. 항상 붙어있었던 엄마와 아들은, 어쩌다 떨어져 있을 때면 슬퍼했다….
 
딸 솔랑주는 상드가 원해서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상드의 고향 친구 아자송(Stéphane Ajasson de Gransagne)이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였다. 상드는 아들 외에 예쁜 딸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솔랑주가 태어났을 때 상드의 마음은 복잡했다. 솔랑주는 평생을 친아버지로 알았던 뒤드방 남작과 자신을 낳아 준 엄마 양쪽 모두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느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심신이 허약했던 모리스에 비해 솔랑주는 정신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 더 강한 아이였다. 솔랑주는 엄마 혹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적 경향이 덜했다. 상드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모리스에게 와는 달리 솔랑주에게는 덜 희생적이었고 덜 포용적이었다. 상드는, 솔랑주를 고집이 세고 길들이기 힘든 성격에 지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상상도 못 할 만큼 게으르다고 끊임없이 비하(卑下)하고 다녔다. 
 
조르주 상드와 두 아이의 그림이 있는 알프레드 드 뮈세의 편지. 1833년 7월 28일.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와 두 아이의 그림이 있는 알프레드 드 뮈세의 편지. 1833년 7월 28일.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밝고 당당한 이 여자아이를 모두 좋아했지만, 엄마만은 예외였다. 상드는 활기찬 솔랑주가 번잡스럽고 소란만 피운다고 생각했다. 딸의 출생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자신의 원하지 않는 모습을 닮은 데 대한 거부감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상드는 관심과 후원을 모리스에게 집중했고 솔랑주에게는 질책과 더 많은 요구만 따랐다. 상드는 전혀 솔랑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솔랑주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고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것에 대해 진정한 응답은 없었다.
 
상드가 독립적 생활을 위해 뒤드방 곁을 떠나 파리로 올라온 지 얼마 후 잠깐 동안 상드는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았다. 그때 모리스는 아버지 카지미르에게 맡겨졌다. 예쁘고 영리한 여자아이에게 상드 주위에 몰려다니던 남자들은 관심과 사랑을 보였다. 아이는 잠깐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자신을 귀여워해 주었던 쥘 상도와 엄마가 헤어졌을 때 아이, 솔랑주는 슬펐다.
 

아들은 기숙학교에 보내고 딸은 방치

두 아이에 대한 배려의 차이는 상드가 시인 뮈세와 사랑에 빠져 베니스로 밀월여행을 떠날 때 분명히 나타났다. 상드는 10살의 모리스를 기숙학교에 맡겼다. 학교에 보내던 날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했던 아들은 교사를 밀쳐내고 엄마에게 달려와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었다. 상드는 가까스로 아이를 떼어냈고 복도 모퉁이 뒤에 숨었다. 우는 아이를 두고 돌아설 때 자신도 울었다.
 
5살의 딸은 간단히 처리했다. 그냥 노앙을 집에 내버려 둔 것이었다. 아무도 감독하지 않는 가운데 하인들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어린 솔랑주는 거칠게 다루어 졌다. 하인들은 행실이 나쁜 엄마를 닮았다며 솔랑주에게 매질을 했다. 하루 밤 지나고 또 하루 밤이 지나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온 것은 9개월 후였다. 그 나이에 그것은 영원같이 긴 시간이다.
 

솔랑주. 조르주 상드의 딸. 남편 클레징제 그림. 1849년. Musee de la Vie romantique, Paris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 동안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딸은 넋이 빠져있었다. 활기 있던 아이는 고분고분한 아이로 바뀌어 있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 그 아이의 자아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잘 안다.
 
밀월여행에서 돌아온 후, 상드는 두 아이 모두 기숙학교에 보냈다. 방학이나 휴일에만 집으로 와서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학이나 휴일을 누리는데 있어서 모리스와 솔랑주에게는 차이가 있었다. 솔랑주는 더 냉정하고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집으로 와서 휴일을 보낼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전남편 카지미르의 돌출행동이 있었다. 그는 상드가 없는 틈을 타서, 막아서는 하인들을 뿌리치고 노앙에 있던 솔랑주를 자기가 사는 가스코니(Gascony)로 데려갔다. 애정에 굶주린 9살의 솔랑주는 아빠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기를 데리고 가자 공포 대신 재미를 느꼈다. 파리의 상드는 그 소식을 듣고 당장 가스코니로 달려갔다. 이것은 딸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정이 떨어진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지방관리들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카지미르의 저택을 둘러싸고 딸을 되찾아 파리로 돌아갔다. 부모의 애정에 굶주렸던 딸은 엄마와 함께 돌아가는 길 또한 행복했다. 이 후 솔랑주에게 비친 엄마 상드의 모습은 크고 강한 것이었다. 딸은 평생을, 한편으로는 자신이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의식을 품은 채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를 위대하고 그리운 존재로 마음에 담고 살았다.
 
딸은 기숙학교를 전전했다. 상드는 딸의 온갖 단점을 교사에게 강조하며 엄격한 관리를 요구했다. 방학이나 휴일에도 학교에 묶어두기를 바랐다. 외출을 원하는 딸에게 엄마는 좋은 성적을 요구했다. 딸은 좋은 성적을 보여주며 엄마 곁으로 갈 수 있는 허락을 원했다. 그러나 엄마는 학교의 평가가 너무 후하다고 주장하며 딸이 학교에 묶여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숙학교에 갇힌 딸은 엄마에게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엄마는 딸의 편지에서 잘못된 철자와 어긋난 문법을 찾아내며 학업의 부족을 꼬집었다. 학부모의 참석이 요구되는 학교 행사가 있을 때 딸은 엄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두고 기다렸다. 그러나 엄마는 ‘사랑하는 나의 천사’로 시작하는 핑계를 늘어 놓는 편지만 보냈고 학교를 방문하지 않았다. 딸의 정성이 담긴 선물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모리스 뒤드방. 조르주 상드의 아들. 루이기 칼라마타의 부인이며 뒤에 모리스의 장모가 되는 조세핀 로쉐트의 유화. 1845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모리스 뒤드방. 조르주 상드의 아들. 루이기 칼라마타의 부인이며 뒤에 모리스의 장모가 되는 조세핀 로쉐트의 유화. 1845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 모리스는 부실했다. 항상 어딘가 아팠고 식욕도 없었고 학업에 진척도 없었다. 매사에 흥미가 느끼지 못했고 체격도 그대로였다. 상드는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같이 붙어 지냈다. 기숙학교에 갇힌 딸은 엄마와 오빠 사이에 앉아보고 싶어했다. ‘사랑해요 나를 잊지 말아줘요’하고 기숙사에 있는 딸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상드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그리운 엄마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이기도 했지만 상드는 기억을 못 했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상드는 솔랑주도 노앙으로 데리고 왔다. 상드는 딸이 무기력하다며 체벌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가정교사를 찾는 상드의 공고에서 딸은 악마로 묘사되었다. 극작가 말피유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고 상드와 그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리고는 앞서 언급했듯이 쇼팽과의 관계가 발전하여 상드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요르카로 떠나게 되었다.
 
마요르카로 가는 길목, 페르피낭에서 쇼팽과 두 아이는 처음 만났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는 쇼팽은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였다. 마요르카에서 가족들은 해안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곳에서 엄마의 보살핌은 따뜻했다. 그곳에서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엄마와의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아이들은 오히려 행복했다. 상드도 마요르카의 시련을 통해 가족간의 유대가 더 단단해 졌다고 했다.
 
신문을 읽고 있는 쇼팽과 그림 그리는 모리스. 폴린 비아르도 그림. 1841년경. 바르샤바의 프레데릭 쇼팽 기념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신문을 읽고 있는 쇼팽과 그림 그리는 모리스. 폴린 비아르도 그림. 1841년경. 바르샤바의 프레데릭 쇼팽 기념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두 아이의 존재는 쇼팽과 상드의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상드는 쇼팽에게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도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상드의 아이들의 입장은 달랐다. 쇼팽이 가족으로 들어온 후, 모리스와 쇼팽은 상드의 보살핌을 두고 경쟁의 관계 속에 놓였다. 이 점은 쇼팽이 의식을 하지 못했지만 모리스의 마음속에는 크게 실재하는 것이었다.
 
병을 달고 사는 사람, 상드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 쇼팽은 모리스와 솔랑주 두 아이에 대하여 동등하게 의붓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솔랑주에게 더 통했다. 쇼팽과 솔랑주 두 사람은 모두,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할 가족과 멀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쇼팽을 솔랑주는 잘 따랐다.
 
이에 비해 모리스에게 쇼팽은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었다. 엄마에게 의존적이었던 아들 모리스는 자신에게 와야 할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보았다. 쇼팽과 상드는 정반대의, 생활방식과 철학 그리고 이념은 극복했지만, 두 아이로 인한 갈등은 극복할 수 없었다.
 
다음 편은 쇼팽과 상드, 두 사람이 딸처럼 대했던 오페라 가수 폴린 비아르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와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와의 관계도 언급된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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