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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막걸리 들고 시인 집에 놀러 간 대통령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1970년 4월 18일 충남 부여 백마강 기슭에 문인 300여 명이 모였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신동엽(1930~69)의 시비 제막식이 열렸다. 문단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소설가 최일남이 사회를, 시인 구상이 식사(式辭)를 맡았다. 소설가 김동리가 추도사를 낭송했고, 시인 박두진이 강연을 했다. 좌우·진영 구분 없이 고인의 시 정신을 돌아봤다. 올봄 신동엽 평전 『좋은 언어로』를 펴낸 시인 김응교는 “신동엽 타계 당시 문단이 하나가 됐다. 이후 이념에 따라 시인의 한쪽만 보려 했으나 요즘에는 그의 전체를 받아들이게 돼 반갑다”고 했다.
 

사랑·혁명의 시인 신동엽
타계 50년 추모 문학기행
“큰 소리 떠든다고 정치냐”
오늘의 편 가르기 꾸짖어

서른아홉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신동엽은 사랑과 혁명의 시인이다. 동학과 한국전쟁, 4·19의 아픔을 매섭게 꾸짖으면서도 사람과 자연의 평화공동체를 나직하게 노래했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껍데기와 같았다. 유작시 ‘좋은 언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외치지 마세요/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조용히/될수록 당신의 자리를/아래로 낮추세요.’ 시인은 목소리가 요란한,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을 질타했다.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자/로케트에 매달아/대기 밖으로 내던져 버려라.’(‘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배우 김중기(왼쪽)와 시인 김응교(가운데)가 지난달 28일 충남 부여 백마강 기슭의 신동엽 시비 앞에서 역할극을 펼치고 있다. 박정호 논설위원

배우 김중기(왼쪽)와 시인 김응교(가운데)가 지난달 28일 충남 부여 백마강 기슭의 신동엽 시비 앞에서 역할극을 펼치고 있다. 박정호 논설위원

지난달 28일, 신동엽 타계 5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독자 40여 명이 백마강 시비 앞에 다시 섰다. 신동엽학회(회장 정우영)가 마련한 ‘신동엽의 부여시대’ 문학기행이다. 시비에는 ‘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생명의 탄생과 소멸, 순환이 편안하고 정답기만 하다. 참석자들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시인의 마음을 묵상했다.
 
이날 자리에선 깜짝쇼도 열렸다. 배우 김중기가 신동엽으로, 시인 김응교가 신동엽보다 한 해 먼저 숨을 거둔 시인 김수영(1921~68)을 맡아 역할극을 펼쳤다. 모더니즘(김수영)과 리얼리즘(신동엽)이라는 각기 다른 얼굴로 60년대를 수놓은 그들은 서로의 가치를 알아봤다. 아홉 살 많은 김수영은 신동엽에게 “소월의 정조와 육사의 절규가 함께 있다”고 칭찬했고, 신동엽은 김수영 타계 당시 추도사 ‘지맥 속의 분수’로 응답했다. 신동엽은 이 글에서 김수영이 어느 날 대폿집에서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 적었다.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
 
부여 신동엽 생가 옆에 세운 문학관 입구에 놓인 시인의 흉상.

부여 신동엽 생가 옆에 세운 문학관 입구에 놓인 시인의 흉상.

‘대역 배우’ 김응교와 김중기는 각기 신동엽과 김수영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와 ‘풀’을 번갈아 낭송했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가 어울렸다. 더 큰 세상을 향한 두 시인의 바람이다. 유령이 환생한 듯 대화를 이어간 두 배우는 관객을 빤히 바라보며 능청도 떨었다.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안 보일 텐데 우리 말은 들리나 봐. 영기(靈氣)가 착한 사람들이야.”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날 참가자들은 신동엽 문학이 싹튼 부여 일대를 돌아봤다. 시인이 다닌 부여초등학교, 시인이 태어난 옛집과 그 곁의 문학관, 서사시 ‘금강’을 구상한 곳으로 알려진 백마강변과 낙화암·고란사 일대를 찾았다. 어제에 멈춘 시인이 아닌 내일을 열어가는 시인을 다시 불러냈다. 기자의 눈엔 문학관에 전시된 ‘산문시1’이 확 들어왔다. 평등한 세상을 소망한 신동엽이 다가왔다.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구절이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퇴근 때 남대문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소주 한잔하며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약속이 겹쳤다. 문 대통령은 이 시를 지난 6월 스웨덴 의회에서 낭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나먼 꿈 얘기처럼 들린다. 조국 사태로 나라가 둘로 갈라진 요즘, 더욱 아스라하기만 하다.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는 정녕 현실정치에선 기대할 수 없는 신기루일까. ‘큰 소리 떠든다고 세상 정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삐 서둔다고 내 인생에 큰 덕이 돌아오진 않을 것’(‘서둘고 싶지 않다’)이란 시인의 마을에서 한 가닥 위로를 받는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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