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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쏜 저격범과 단둘이 만나 용서한 교황

동유럽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상> 

요한 바오로 2세가 아홉 살 때 첫 영성체를 받았던 폴란드 바도비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백성호 기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아홉 살 때 첫 영성체를 받았던 폴란드 바도비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백성호 기자

올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 2005)의 탄생 100년이다. 9월 말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주최한 ‘동유럽 가톨릭 성지순례’에 동참했다. 폴란드와 체코, 오스트리아에 걸쳐서 가톨릭 수도원과 대성당에 녹아 있는 영성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요한 바오로 2세 탄생 100년
고국 폴란드 곳곳에 발자취
자유노조 민주화 투쟁도 불 붙여

폴란드에는 ‘마음이 힘들고 몸이 지칠 때는 남쪽을 보라’는 속담이 있다. 이유가 있다. 폴란드 국토의 90%는 평야다. 나머지 10%가 산지다. 그 산들이 남쪽에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 바도비체도 산이 많은 남쪽이다.
 
지난달 22일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를 거쳐 바도비체로 갔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아홉 살 때 첫 영성체를 받은 ‘바도비체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성당 안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미처 못 들어간 신자들은 성당 출입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종교의 열기가 식어가는 유럽에서 폴란드는 달랐다. 국민의 87%가 가톨릭 신자다.
 
폴란드 국민에게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금도 ‘살아 있는 영웅’이다. 백성호 기자

폴란드 국민에게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금도 ‘살아 있는 영웅’이다. 백성호 기자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가로 갔다. 대성당 바로 옆집이었다. 유대인 상인의 건물 2층 방에 세 들어 살았다고 한다. 유년의 그가 늘 앉는 식탁 테이블 자리는 창가였다. 거기서 머리를 숙인 채 창밖을 올려다보면 성당 꼭대기의 시계가 보였다. 거기에는 ‘시간은 달아나지만 영원함은 머문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쉼 없이 흘러가며 사라지는 시간과 그 깊은 바탕에서 머물고 있는 영원, 다시 말해 ‘순간과 영원’은 유년의 그에게 작지 않은 묵상 거리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젊을 적 꿈은 극작가였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의사였던 형은 인턴 때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돼 사망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인 아버지도 그가 대학생 때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연극의 꿈을 접고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폴란드의 학생들을 데리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산과 들로 피정을 다니며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전 광주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가톨릭 역사에서 교황 제도가 생긴 이래 455년간 이탈리아 출신만이 교황이 됐다. 당시에는 비이탈리아 출신이 교황이 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국 폴란드는 그때 종교를 탄압하던 공산국가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선출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생가의 식탁. 그는 오른쪽 의자에 앉아 창밖 교회 시계탑을 올려다 보았다.

요한 바오로 2세 생가의 식탁. 그는 오른쪽 의자에 앉아 창밖 교회 시계탑을 올려다 보았다.

1978년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조국 폴란드를 방문했다. 공산당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차단했다. 바도비체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 거리인 쳉스트호바에는 야외 언덕이 있다. ‘검은 성모’로 유명한 야스나고라 바오로 수도원 앞이다. 교황의 방문 당시 이곳에 제단이 만들어졌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였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냉전의 벽에 돌멩이를 던졌다. 용기를 내 현장을 찾은 폴란드 군중은 교황과 함께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에 감격했다. 그걸 기점으로 폴란드 자유노조의 16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이 촉발됐다.
 
교황이 바티칸으로 돌아간 직후 폴란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많은 가톨릭 성직자가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아돌프(히틀러)’란 별명을 가진 폴란드 당서기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밥은 먹었는지, 가족은 잘 있는지 등 소소한 이야기를 꺼내며 상대방을 녹였다. 훗날 고르바초프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니었다면 지금 불고 있는 민주화 바람은 없었을 것이며, 먼 미래의 일이 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성바오로 은수자회 수도원의 성당에는 ‘검은 성모(Black Maddona)’ 그림이 걸려 있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나사렛에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가 함께 썼다는 나무 식탁에다 사도 루카(누가)가 그린 그림이라는 오래된 전승도 있다. 이 ‘검은 성모’ 바로 왼편에 피 묻은 영대(가톨릭 성직자가 가슴 앞으로 내려걸치는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1980년 터키 청년의 암살 시도 때 요한 바오로 2세가 걸치고 있었던 영대다. 지금도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81년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서 대중을 만나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저격을 당했다. 총알은 1㎜ 차이로 심장을 비켜갔다.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한 요한 바오로 2세는 곧장 감옥으로 갔다. 자신을 쏜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를 만나 20분 동안 수행원과 언론매체도 없이 둘이서만 비밀 대화를 나누었다. 감옥에서 나온 요한 바오로 2세는 “둘만의 대화는 비밀로 남을 것이다.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합시다. 나는 이미 그를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용서 메시지는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를 자신의 삶으로 실천한 ‘숨 쉬는 설교’였다. 그걸 통해 ‘하느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오는지를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선종 직전의 마지막 유언도 ‘용서와 평화’의 삶에 대한 고요한 증언이었다.
 
바도비체·쳉스트호바=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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