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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농 “포로 뱃속 편하게 해주면 세뇌는 저절로 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5>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바이올린 연주하는 미군 포로. 1951년 12월, 평안북도 벽동군 외국인 포로수용소. [사진 김명호]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바이올린 연주하는 미군 포로. 1951년 12월, 평안북도 벽동군 외국인 포로수용소. [사진 김명호]

6·25전쟁 시절 중국지원군은 외국인 포로에게 관대했다. 벽동이나 강계지역에 수용됐던 미군 포로들의 체험담에는 특징이 있다. 중국을 원망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 미국은 중공군이 포로들을 세뇌했다며 중국을 매도했다. 지원군 총정치부 주임 두핑(杜平·두평)이 미국의 주장을 리커농(李克農·이극농)에게 보고했다. 훗날 두핑은 리커농의 말을 회고록에 남겼다. “리커농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전장이 제1전선이라면 적에 대한 공작은 제2전선이다. 미국은 우리와 함께 항일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공산당이 세뇌에 능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미국의 주장은 맞다. 포로정책은 별것 아니다. 우수한 인력이 고향 사람 대하듯 하면 해결된다. 잘 먹이고 뱃속 편하게 해주면 세뇌는 저절로 된다.”
  

북한 지역 수용소 철책·담장 없어
미군 포로 짐 보따리엔 누드 사진
유기그릇 금과 혼동해 몇 개씩 소지

터키군 친형제처럼 서로 보살펴
영국군 조용하고 독서·토론 즐겨

병동엔 부상병보다 동상 환자 더 많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 왼쪽 둘째)을 수행, 극비 방문한 키신저를 맞이하는 지자오주(왼쪽 첫째). 1971년 7월 9일. 베이징 난위안(南苑)공항. [사진 김명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 왼쪽 둘째)을 수행, 극비 방문한 키신저를 맞이하는 지자오주(왼쪽 첫째). 1971년 7월 9일. 베이징 난위안(南苑)공항. [사진 김명호]

1996년 봄, 신화통신 홍콩지사장 저우난(周南·주남)도 한 잡지에 강계시절을 회상했다. “강계 외국인 포로수용소의 책임자는 조선족이었다. 나는 내근 조장을 하며 주로 장교들을 심문했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쓸 만한 정보가 있었다. 가족관계, 지휘관의 성격, 기병 1사단이 어떤 부대인지, 이런 것들이었다. 흑인들이 백인보다 호감이 갔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분개하며 전쟁 끝나면 중국에 남겠다는 미군도 여러 명 있었다. 실제로 내가 심문한 장교 한 명은 정전협정 체결 후, 귀국을 포기했다. 산둥(山東)의 공장에 취업해 중국 여인과 가정 꾸리고 눌러앉았다. 전쟁 초기 포로들은 힘들어했다. 우선 배가 고팠지만 우리와 같이 먹다 보니 불평은 없었다.”  
 
추위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야전병원에 가본 적이 있다. 부상병보다 동상 환자가 더 많았다. 코가 경극 배우 분장한 것처럼 하얗게 얼어버린 동료가 있었다. 만지면 떨어진다며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판문점담판견증록(板門店談判見證錄)과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전쟁 관련 서적의 역자로 널리 알려진 궈웨이징(郭維敬·곽유경)은 벽동 외국인 포로수용소 간부였다. 믿을 만한 기록을 남겼다. “수용소에 담장이나 철책을 만들지 않았다. 주변에 중립지역이나 미군의 탈출을 도와줄 우방이 없었다. 식품과 의료시설은 부족했지만, 대부분의 포로는 구타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벽동 수용소에는 15개국 포로들이 몰려있었다. 나라마다 풍속, 습관이 달랐다. 사상과 문화도 상이했다. 표현 방법이 천차만별이었다. 미군 포로가 가장 많았다.”
 
미군 포로들은 수염이 덥수룩했다. 혼자 웅얼거리다 한숨 내뱉는 습관이 있었다. 참전 이유도 단순했다. “세계를 주유하며 안목 넓히고 싶었다”. 신앙을 물으면 금전, 미녀, 위스키라는 답이 의외로 많았다. 유기그릇을 금과 혼동했다. 한두 개씩은 소지하고 있었다. 평안도 일대에는 유기 공장이 많았다. 중국  
 
지원군도 마찬가지였다. 유기 요강에 밥을 해 먹곤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90년대 초까지도 유기 요강에 국이나 찌개 끓여 먹는 집이 간혹 있었다.
 
미군 포로 짐 보따리에는 여자 나체사진이 빠지지 않았다.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서너 장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서로 돌려보며 명화 감상하는 사람 같았다. 흑백문제는 수용소 안에서도 여전했다. 백인들은 흑인과 같은 난로 쬐기를 싫어했다. 목사 말이라면 무조건 잘 들었다. 중국 지원군에게 불만이 많았다.  
 
“우리는 정의의 사자다. 유엔의 경찰 임무를 수행하러 이 땅에 왔다. 공산주의가 만연되는 것을 저지하고, 한국의 독립과 통일이 목적이다. 전쟁이 지연되는 것은 너희 중국 군대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마당에, 우리가 남한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이 적화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미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무기도 정교하다. 비행기와 대포도 많다. 북한은 약소국이다. 우리의 상대가 못 된다.”
 
미군 포로들은 동정심이 없었다. 한 방에 환자가 있어도 돌보지 않았다. 1951년 겨울, 감기 환자가 발생했다. 고열에 시달렸다. 양옆에 두 사람은 전염될까 두려웠다. 심야에 환자를 들어서 건물 밖에 내놨다. 산채로 얼어 죽었다. “동북이나 시베리아에 끌려갈지 모른다. 후방에 가면 죽여버릴 것이 분명하다”며 도망친 포로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민가에서 밥 훔쳐먹고, 산속에서 뱀 잡아먹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터키 포로들 화덕 만들어 빵 구워 팔기도
 
저우난은 외국인 포로 심문관을 마 친 후 외교계에 투신했다. 영국과 2년에 걸친 홍콩 반환 협상의 중국 측 대표였다. 중영연합성명 초안에 서명하는 저우난(오른쪽). 왼쪽은 중국주재 영국대사 에반스. 1984년 9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저우난은 외국인 포로 심문관을 마 친 후 외교계에 투신했다. 영국과 2년에 걸친 홍콩 반환 협상의 중국 측 대표였다. 중영연합성명 초안에 서명하는 저우난(오른쪽). 왼쪽은 중국주재 영국대사 에반스. 1984년 9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터키 포로들은 미군과 천양지차였다. 대부분이 농민과 유목민 전사의 후예들이었다. 고통을 삼킬 줄 알았다. 포로생활에 잘 적응했다. 83%가 경건하고 성실한 무슬림이다 보니 동료들을 친형제처럼 대했다. 수용소 안 여기저기 다니며 폐허 속에서 뭔가 찾기를 즐겼다. 벽돌 조각 모아 화덕도 만들었다. 직접 구운 빵을 미군 포로들의 시계와 교환하곤 했다.
 
영국 포로는 문화 수준이 높았다. 참전군 숫자가 많다 보니 포로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조용하고 독서와 토론을 즐겼다. 2차 세계대전 참전경험 있는 직업군인이 대부분이었다. 미군은 거칠다며 깔보는 경향이 있다. 다툴 때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심문관들에게 호감을 줬다. 훗날 영국 대사 역임한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의 구술을 소개한다. “하버드 대학 2학년 때 귀국했다. 칭화대학 재학 중 판문점 담판장에서 통역과 속기사 하며 영국 기자와 자주 접촉했다.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벽동 외국인 수용소 인근에 있던 중국 지원군부대를 영국군 비행기가 맹폭했다. 그날 밤 영국군 포로들은 중국군의 보복이 있을 거라며 두려워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 없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의 포로관리를 세계에 알리겠다고 장담했다.”
 
1952년 봄부터 벽동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날이 풀리고 보급이 원만해졌다. 관리 인원도 늘어났다. 이발소와 목욕시설이 들어섰다. 화장실도 개조하고 병원도 문을 열었다. 환자가 줄어들었다. 관리 책임자도 새로 부임했다.
 
새 관리 주임 왕양궁(王央公·왕앙공)은 정전담판 대표도 겸했다. 왕양궁은동북군구(軍區) 소속 소수민족 정책 전문가였다. 소련에서 귀국해 전범 수용소에 수용 중인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의 전담 관리인이었다. 포로들의 문화와 오락, 체육 활동을 중요시했다. 송환을 앞둔 포로가 “왕양궁 같은 사람이 포로수용소 소장이면, 다시 전쟁터에 나가도 포로가 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포로 관리의 귀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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