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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1945'- 오페라 문턱 낮춘 토종 리얼리즘 오페라의 탄생

옛날 서양 귀족옷을 입고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뜻 모를 사랑 노래를 부르는 한국 성악가들의 모습이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우리에게 ‘오페라’를 본다는 건 어쩌면 그런 어색함을 견디는 일이다.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9월 27~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국립오페라단이 이런 오페라의 진입 장벽을 과감히 허물어버렸다. 100% 토종 리얼리즘 오페라의 탄생을 알린 ‘1945’(9월 27~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해외 창작진의 힘도 전혀 빌지 않았다. 2년 전 아름다운 국악음악극 ‘적로’로 관객의 가슴을 적셨던 배삼식 작가, 최우정 작곡가, 정영두 안무가가 다시 뭉쳤고, 최고 연출가 고선웅까지 가세한 ‘드림팀’이 초연부터 완성도 높은 무대를 뽑아냈다.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1945’는 1945년 9월, 해방 후 만주벌판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모여든 난민들의 이야기다. 위안부 출신의 분이와 미즈코, 두 여인의 우정과 연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아직도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끼친다.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 2017년 국립극단에서 공연된 동명 연극 원작을 오페라로 변주한 무대다. 타장르의 무대에서 성공한 텍스트에 음악을 덧입히는 시도는 대부분 아쉬움을 남기는 게 보통이지만, ‘1945’는 이야기에서 음악으로 주인공이 자연스레 옮겨오며 놀라운 대중성으로 오페라의 문턱까지 낮춰버렸다.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최우정 작곡가는 거침없이 대중적인 멜로디를 사용해 공감대를 훌쩍 높였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 트로트 ‘울리는 만주선’, 민요 ‘아리랑’ 등 누구나 친숙한 대중곡에서 따온 모티브를 도처에 심어 놓은 것부터 객석을 무장해제 시킨다. 한국어로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바닷바람 흔들리는 귤나무 아래 하얗게 펼쳐진 소금밭 위에 이 아이를 낳을거야’라고 넘치는 사랑을 노래하는 미즈코의 아리아를 시작으로, 서정적인 선율에 실린 시적인 가사들은 뮤지컬처럼 귀에 착착 감겼다. 두 아이의 천진한 동요풍 노래로 전하는 소녀들이 팔려가는 풍경도 그 어떤 방식의 묘사보다 임팩트가 셌다.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애이불비’를 모토로 울고 웃는 휴먼드라마를 만드는 고선웅식 재치 넘치는 연출은 오페라에서도 유효했다. 극한 상황에서도 여전한 인간의 질펀한 욕망은 톡톡 튀는 가사와 리듬에 실려 가볍고 경쾌하게 표현됐고, 기차놀이나 떡찧는 장면 등 합창과 군무로 오페라만의 장르적 매력을 살려 원작 연극보다 스펙터클한 재미를 더했다. 
 
고선웅식 유머를 살려내는 성악가들의 찰진 연기도 놀라웠다. 유럽 무대에서 활약 중인 소프라노 이명주와 뮤지컬 ‘팬텀’ ‘안나 카레니나’등에서 낯익은 소프라노 김순영이 분이와 미즈코로 분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른다. 하지만 분이와 미즈코만 주인공은 아니다. 일본인 행세를 하며 한국인을 착취하던 친일파,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을 경멸하는 구제소 관리인, 가난과 압제를 벗어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과 변화가 두려운 노인…리얼한 인간군상이 모두 돋보인다.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한일관계 악화로 반일감정이 들끓고, 나라가 두동강이 나 이념논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예술가들이란 멀리 보고 앞서가는 존재들이다. 배삼식 작가는 시대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을 담담히 그려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 소녀만 위안부 노릇을 했던 게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고, 그들을 착취하며 포주 노릇을 하던 한국인 여성도 그저 잊고 싶은 과거와 살고 싶은 의지를 지닌 인간일 뿐이다. 고선웅 연출은 전작인 뮤지컬 ‘아리랑’에서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을 말하며 화해를 권했었다. 남의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무대랄까. 
 
4막 엔딩으로 치달으며 궁지에 몰린 두 여자의 우정과 연민에 눈물이 맺힐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오페라를 보며 감동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껏 피부로 느낄 리 없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그들이 겪은 지옥이 거기 있었다.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 [사진 국립오페라단]

객석을 향해 달려오는 열차에 아귀다툼을 벌이며 올라타는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대조가 선명하다. 희망의 상징인지 욕망의 상징인지 모를 거대한 열차가 떠나가고 순백의 설국이 펼쳐지면, 결국 남겨진 건 국가나 민족이 아닌 사람뿐. 손을 맞잡은 사람과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돌려주는 무대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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