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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386의 회고 "김일성에 충성맹세한 나, 달라진 이유는…"

 
1984년 신림동의 허름한 선술집은 울분이 가득했다. 테이블 대신 드럼통 몇 개를 세워놓은 선술집에서 나는 막걸리에 김치를 안주 삼아 광주에 총부리를 들이댄 군부에 분개했고, 무력한 우리의 처지를 한탄했다.

[창간기획] 386의 나라 대한민국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의 회고

 
그 시절 나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풋내기 신입생이었다. 1년 전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지만 의학 서적보다는 사상ㆍ철학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내 주적은 전두환이었다. 결국 의예과를 중퇴한 뒤 다시 시험을 쳐 국사학과에 들어갔지만 의사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술기운에 친구들과 목 놓아 부른 ‘님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 출정가’의 곡조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김일성에 충성 맹세했던 그날

1987년 4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전두환 정권 퇴진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4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전두환 정권 퇴진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우야, 서클 모임 가자”
84년의 어느 봄 날 학교 잔디밭에 하릴 없이 누워 있는데 82학번 운동권 선배 한명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사회과학연구회, 일명 ‘애플(사과)’이라는 서클에 가보자는 거였다. 그때부터 학생운동에 눈을 떴다. 정권 퇴진 가두시위에 늘 앞장섰고, 몽둥이찜질을 당해 멍투성이가 돼도 훈장으로 여겼다. 경찰에게 얼차려를 받거나 폭행 당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빨갱이 새끼들. 다 죽여야 돼” 
몇몇 경찰들은 증오에 가득 차 욕설을 내뱉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불쌍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거리로 나갔다.  
 
2학년이 되자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데모하던 신입생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주일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레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자 대학가에 파란이 일었다.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는 김영환씨(서울대 82학번)가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들여왔다.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자’는 구호가 부쩍 늘었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구학련(구국학생연맹)이 조직됐고, 캠퍼스에는 눈초리를 번뜩이는 사복 경찰이 출몰했다.
 
운동권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내게 어느날 구학련에서 ‘영입제의’가 왔고 당연히 받아들였다. 모임을 하러 선배 자취방을 갈 때도 추적을 피하려 일부러 버스를 갈아타고 빙 둘러갔다. 선배의 방에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 북한 관련 팸플릿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돼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을 향해 ‘충성 맹세’를 했다.  
“위대한 수령,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어두운 자취방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던 1986년의 어느 날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강성이었던 내게도 고민은 있었다. 김일성 개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형,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결국 나는 한 달 만에 구학련을 탈퇴했고, 대학가는 1987년의 봄을 앞두고 급속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87년의 봄, 한가운데에 서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중앙포토]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중앙포토]

 
이 무렵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도를 넘었다. “학생, 재야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자행됐고, 같은해 건국대 점거농성으로 학생들이 1200명 넘게 구속됐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했다. 대학가에는 일종의 비장함이 흘렀다.
 
나는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이때부터 주요 수배자 명단에 올라 짐을 싸 집에서 나왔고, 여인숙이나 하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느날 경찰에 붙잡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 학생회 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기습 시위 작전을 짰다. 수요일엔 명보극장에서 기습 시위를 하고, 다음날엔 신촌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식이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책임을 뒤집어 쓸 희생양도 미리 정했다. 다른 학생들이 도망칠 동안 이목을 끌고, 혼자 잡혀가는 역할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서로 손을 들었다.
 
그해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의식을 잃었고 한달 뒤 사망했다. 이때부터 시위 현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교수, 주부,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쏟아 나왔다. 결국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6.29 선언을 발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날 나는 동지들과 끌어안고 밤새 술을 마셨다.
 

‘간첩 혐의’로 두 번 구속되다

87년 대선이 끝나고 ‘관악청년회’라는 조직에 몸담았다. 기계 부품을 만드는 신림동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동자들과 몸을 부대끼며 일하고, 밤에는 그들에게 역사, 한문을 가르쳤다. 보람은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수년 간 공장 일을 하면서 다치기도 하고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결국 공장을 나와 쉬고 있는데,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쪽에서 함께 일 하자고 연락이 왔다. 평소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범민련 활동은 천직이었다. 1995년부터 10년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맡았다. 북한에 보낼 정보나 서신 등을 정리한 뒤 일본사무소를 경유해 북측에 보내는 게 내 일이었다. 북 측에서 “민 처장을 거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잔뼈가 굵었다. 이 시기 운동권 동지들이 대거 정치권에 입성했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도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기득권이 되는거야”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비판했다.
 
1997년 대법원에서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판단하면서 삶은 다시 고달퍼졌다. 중견 회원들이 대거 구속되고, 나도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도피 중에도 비밀 모임을 했다. 암호를 정해 ‘A로 갑시다’라면 혜화역 다방에서 만나고, ‘B로 합시다’면 신림동 카페에서 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딱 하루 급한 일로 범민련 건물에 들렀는데, 정장 차림의 안기부 요원들이 나를 둘러쌌다. 
“안기부다! 안기부에서 왔다!”
나는 끌려가면서도 다른 회원들을 살려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민경우씨가 2005년 8월 14일 특별사면 직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8.15남북통일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연합뉴스]

민경우씨가 2005년 8월 14일 특별사면 직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8.15남북통일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연합뉴스]

 
나는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하면 혀를 깨물어서 기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사는 예상 외로 조용하게 진행됐지만 나는 간첩 혐의로 기소돼 징역을 살았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남북 관계에 봄기운이 흘렀다. 나는 다음해 8.15 특사로 석방됐고 다시 범민련 활동을 재개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더 숨통이 트여 도피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2003년,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데 회색 승합차 한 대가 버스를 가로 막았다. 국가정보원 요원들이었다. 두 번째 구속, 나는 또다시 북한에 국내 동향을 전달했다는 간첩 혐의로 징역을 살았다.
 

수학, 인공지능, 로봇...출소 후 더 큰 세상 보였다

2005년 여름, 교도소를 나서자 동지들이 꽃다발을 건네줬다. 코끝이 찡했다. 다음해부터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에 들어가 정책기획팀장으로 일했다. FTA를 결사반대하며 뛰어든 일이었는데, 이게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 시절 나는 북한이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미FTA를 반대하는 논리를 찾으려 각종 경제 서적이나 무역 자료들, 경제연구소 보고서들을 읽어보다가 내가 모르는 세상과 부딪혔다. 평생을 사회 운동에 매몰됐던 나는 이 시기에 교육자, 과학자, 기업가들을 만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민경우(오른쪽)씨가 2005년 8월 전주교도소에 출소하던 당시 모습. 왼쪽은 고 이종린 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민경우씨 제공

민경우(오른쪽)씨가 2005년 8월 전주교도소에 출소하던 당시 모습. 왼쪽은 고 이종린 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민경우씨 제공

 
수십년을 주체사상, 민족의식에 매몰돼 운동하는 동안 세상에는 스마트폰이 나왔고, 인공지능이 개발됐고, 드론이 날았다. 정의를 외치던 동지들은 어느덧 우리가 저항하던 기득권으로 변신해 있었다. 민주화 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자랑하는 정치인들은 내가 보기엔 수박 겉핥기로 운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나를 둘러싼 진영논리를 고집하는 게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나는 당원으로 활동했던 민주노동당에서 ‘NL(National Liberationㆍ민족해방)’ 자정 운동을 벌이고, 청년들에게 공천을 주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밥그릇을 뺐긴다고 느낀 기성 당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내가 몸 바친 운동이 어디로 흘러가는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의대까지 포기하며 학생운동에 모든 걸 바쳤던 내가, 30년이 지나서야 과학과 수학이 그리워졌다. 아이들에게 민족주의나 진영논리 대신 과학을 가르치고 싶었다. 나는 일부러 서울에서 평균 소득이 가장 낮다는 금천구에 수학연구소를 차렸다. 신기루 같은 이념에 묻혀 살던 나의 삶을 반추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며칠 전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데 한 아이가 내 펜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일본 펜쓰면 친일파래요”
나는 빙긋 웃으며 책을 덮고 아이들에게 로봇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일본 펜을 쓰는 사람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것보다, 우리의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진정 일본이 두려워할 일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운동이란 운동을 다 해본 그 시절을 후회하진 않는다. 나는 뜨거운 가슴으로 운동에 뛰어들어 도피 생활과 교도소 신세를 당연하게 여기며 사회 운동에 투신했다. 불길에 그슬려진 ‘불나방’이 돼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쟁에 매몰돼 훌쩍 지나쳐버린 것들도 많았다. 나는 요즘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탐사기획팀=김태윤·최현주·현일훈·손국희·정진우·문현경 기자

pin21@joongang.co.kr
 
민경우씨는 모든 ‘운동’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한미FTA 반대 운동까지 그가 발을 담지 않은 사회운동은 드물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민경우씨는 모든 ‘운동’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한미FTA 반대 운동까지 그가 발을 담지 않은 사회운동은 드물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해당 기사는 386운동권 출신인 민경우(서울대 84학번)씨와의 심층 인터뷰를 바탕으로 민씨의 시점에서 작성한 스토리텔링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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