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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 쇼팽과 급진파 상드, 이 커플이 사는 법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3) 

프레데릭 쇼팽. 샤를-앙리 리망 Charles-Henri Lehmann. 1847.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기념관.

 
둘은 너무 달랐다. 외양부터 달랐고 생각과 추구하던 이념도 달랐다. 남자는 독실한 구교 신자로서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프랑스 출신의 농민의 후손이었는데 태어난 곳은 폴란드였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귀족 자제들과 같이 성장하며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주위 평판에 신경을 썼고 예의범절을 중시했다. 우연히도 그의 전성기는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왕정의 시기와 거의 겹친다. 21세의 그가 파리에 도착하기 한 해 전(1830년)에 프랑스 시민들은 부르봉 왕조를 무너트리고 루이 필리프 왕정을 세우는 7월 혁명을 일으켰다.
 
루이 필리프 왕정은 당시 각종 산업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귀족과 기존의 토지를 기반으로 한 구 귀족의 타협 하에 태어난 중도성향의 체제였다. 유럽의 변방 출신의 음악가인 그 남자, 쇼팽이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필리프 왕정의 주류층이 그의 음악의 소비자이며 후원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선조가 폴란드 왕족까지 연결되는 그 여자는 프랑스 중부지방의 시골, 노앙에서 자랐다. 그곳에 큰 저택과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할머니 아래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지만, 그녀는 그곳 농민들의 아이들과 들에서 뛰어놀며 컸기 때문에 농민처럼 생각했고 언행도 그들처럼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전통에 속박받지 않았고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도 때로는 비판적이었다.
 
이념적으로는 그녀는 루이 필리프 왕정을 무너뜨린 2월 혁명(1848년)을 지지한 인물이다. 루이 필리프 아래에서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전을 겪게 되었고, 이때 시민의식이 크게 성장한 중소상공업자, 노동자들 그리고 농민들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난 것이 2월 혁명이다. 그 혁명의 주체세력 중에서도 그 여자, 조르주 상드가 속한 그룹은 중소상공업자보다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는 급진파였다.
 
정장을 한 조르주 상드. Alcide Joseph Lorentz. 1842년. 프랑스 국립 외젠 들라크루아 미술관 소장.

정장을 한 조르주 상드. Alcide Joseph Lorentz. 1842년. 프랑스 국립 외젠 들라크루아 미술관 소장.

 
이념을 앞세웠으면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을 두 사람은, 차이를 극복했고 9년이라는 긴 세월을 같이 보냈다. 그 시간 중 두 사람은 안정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쇼팽은 음악인생의 정점을 경험했고 상드도 사회활동과 작품 출간, 모두에서 생산적인 시기였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을 오랫동안 이어주고 그 관계가 생산적인 시간을 통하여 지속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이유는 두 사람이 모두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서로 장점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 주었다는 것도 두 사람의 성공적인 동행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대에게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면 되었기에 두 사람은 같이 있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어떤 두 사람이 맺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의 가족과 두 사람의 친구까지 받아들여짐으로써 완성된다. 쇼팽과 상드의 경우, 두 사람만큼이나 두 사람의 친구들 또한 서로 달랐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배려와 아량을 낳았기 때문에 둘은 각자의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여름을 보냈던 시골, 노앙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쇼팽은 파리에서의 저녁 사교모임과 극장의 공연을 아쉬워했고 친구들도 그리워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상드는 쇼팽의 친구들을 노앙에 초대하여 그의 기분을 전환하려 노력했다. 그 친구 중에는 ‘향기’ 풍기는 귀부인도 있었다. 천성적으로 고귀하게 구는 귀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상드였다. 하지만 쇼팽의 친구와 어울리려 노력하였고 일부와는 죽이 맞기도했다.
 
일 년의 나머지 반을 보내는 두 사람의 파리의 아파트는 언제나 음악가, 화가, 작가 드리고 배우들이 모이는 활기찬 곳이었다. 특히 상드의 친구였던 급진적인 저널리스트나 행동가들이 제멋대로의 모습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고 때로는 정치적 구호로 소란을 떨기도 했다. 깔끔한 모습에 남에게 불편을 주는 것을 절대 하지 않는 쇼팽이었다. 고삐 풀린 듯한 그들이 쇼팽에게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쇼팽은 상드의 ‘땀 냄새’ 나는 손님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행동해도 그저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았고, 심하다 싶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는 정도였다. 상드의 딸 솔랑주는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무리가 만든 무질서 속에서 쇼팽이 예의 바른 태도로 모범을 보였다고 칭찬했다.
 
상드가 병약한 쇼팽에게 보인 희생과 헌신도 두 사람 사이를 유지하는 절대적 밑받침이었다. 쇼팽은 타고난 약골이었다. 상드를 만나기 얼마 전 겨울에는 아주 심하게 앓아서 죽었다는 헛소문이 바르샤바의 가족들에게까지 퍼지기도 했었다.
 
두 사람이 커플이 된 얼마 후 요양차 방문한 마요르카에서는 악천후에 쇼팽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었다. 이때 상드가 보인 초인적인 보살핌은 그를 살아 돌아오게 했다. 매년 겨울이면 감기로 고생하던 그였다. 어머니 같은 상드의 헌신적 보살핌이 없었으면 그의 음악 활동은 고사하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모리스 상드의 스케치. 상드, 모리스, 솔랑주가 쇼팽을 재촉하고 있다.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소장.

 
두 사람이 생각이나 이념의 차이로 논쟁하거나 다투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대신 서로의 장점을 살리는 방법으로 지역 주민과 어울렸다는 기록은 있다. 지방 축제 때는 노앙의 주민들과 함께 지칠 때까지 춤을 주기도 했던 그들이었다. 노앙의 상드 저택 내에 만들어진 사설극장에서는 상드가 쓴 대본의 극을 쇼팽의 피아노에 맞춰 공연하였고, 그곳을 찾은 두 사람의 손님과 이웃의 주민들이 함께 즐겼다.
 
노앙 근처 마을에서 벌거벗은 채 떠돌고 있는 한 여자아이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지적 장애가 있었던 아이는, 돌보아 주었어야 할 보육원에서 버림받았다. 그 십 대의 아이는 폭행을 당했고 임신을 한 상태였다. 보육원은 의무를 망각했고 관련 당국은 무책임했다. 아이의 사례는 지역 사회에 큰 반향을 낳았다.
 
상드는 그 사건을 알리고 고착된 당국의 비리를 고발하며, 주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지방신문을 발행하려 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지도 모았다. 하지만 인쇄업자는 지방 당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일의 진행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쇼팽은 그들의 뜻에 공감하며 어려움에 부닥친 상드와 동료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신문의 첫 번째 후원자가 되어 힘을 보탰다.
 
그 과정에서 때로 그녀가 너무 앞서간다고 생각될 때는 신중할 것을 충고했고, 같이 행동하던 사람 중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상드의 급진적 행동은 때로 아슬아슬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아들 모리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엄마가 혹시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러한 일은 없었다. 쇼팽의 존재가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얼마만큼의 제어와 통제의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쇼팽과 헤어진 후에 상드의 행동은 좀 더 과격해졌고, 위험에 처할 뻔하기도 한 것과 비교해 볼 필요는 있다.
 
피아노 치는 쇼팽과 그것을 듣고 있는 상드. 우편엽서. Adolf Karpellus. 1917. [사진 Wikigallery (Public Domain)]

피아노 치는 쇼팽과 그것을 듣고 있는 상드. 우편엽서. Adolf Karpellus. 1917. [사진 Wikigallery (Public Domain)]

 
2월 혁명 때 일이다. 쇼팽과 헤어지고 노앙에 머무르고 있던 상드는 혁명의 발발 소식을 듣고 급히 파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혁명파 중에서도 급진파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혁명 후 실시된 선거에서 그들이 믿었던 농민과 노동자들은 급진파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급진파는 선거에 불복하였고 선거 결과로 구성된 정부에도 과격한 저항을 하였다.
 
결국 정부의 강경책을 불렀고 상드의 동료 중 다수는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상드도 급히 노앙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 후로 상드는 주로 노앙에 머물면서 여생을 조용히 살게 된다. 서로 생각과 이념이 달라도 상호 간에 배척 없이 동행하는 것이 궁극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가 적절한 가속과 감속의 균형에 기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는 상드의 두 자녀에 관한 것이다.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주가 두 사람 관계에 준 영향은 컸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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