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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 ①이승엽의 '성장 일기' 국민타자·야구 포기·150억 눈물


"야~. 추억 돋네요. 이런 때가 있었죠. 이 기사 잘 썼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사진첩을 꺼내 열어보는 것 같았다. 수십 개의 일간스포츠 1면 기사를 넘길 때마다 이승엽(43)의 표정은 계속 바뀌었다.

그 안에는 열여덟 소년이 공을 던지는 모습, 스무 살 청년이 ‘국민타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과정, 프로야구 홈런왕 최초로 50홈런을 향하는 여정이 담겨 있었다. 이승엽이 환호하는 사진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일간스포츠는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기사 하나, 사진 하나가 모여 야구선수 이승엽의 ‘성장 일기’를 만들고 있었다.

일간스포츠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1면에 실린 이승엽 기사와 사진을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간스포츠는 이승엽의 50홈런 도전을 발자취를 가장 가까이서 따라잡은 스포츠신문이다. 이승엽의 고교 시절부터 함께한 동반자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후반 이승엽은 일간스포츠 1면을 가장 많이 장식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특히 54홈런을 기록한 1999년에는 전년도 타이론 우즈가 작성한 KBO 리그 개인 최다 홈런 기록(42개)과 타이를 이룬 42호 홈런부터 신기록 43호·또 44호 홈런까지 연속 1면을 차지했다. 2003년에는 50홈런부터 카운트다운에 돌입, 그가 타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낼 때마다 일간스포츠 1면을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 IMF 구제금융으로 어려웠던 시기, ‘국민타자’의 홈런은 국민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이었다.

이승엽에게도 ‘국민타자’라는 별명을 붙인 매체가 일간스포츠다. 당시 노재원 기자(현 미주법인 본부장)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이승엽은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국민타자'라는 수식어가 '좋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당시에는 너무 무거운 타이틀로 느껴져 부담이 조금 되기는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수식어는 아니다. 이승엽도 "'국민배우' 안성기, '국민가수' 조용필 등을 떠올리면 정말 기분 좋은 별명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느꼈다. '국민타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기자분께 정말 감사하다. 죽을 때까지 큰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인사했다.
 
 
『이승엽 삼성 입단』 1994년 12월 23일 2면


이승엽은 프로 입단 전부터 주목받던 유망주 출신으로 고졸 최고 몸값(1억5200만원)으로 삼성에 입단했다. 그는 "고교 시절 신문 기사도 모두 아버지가 모아서 스크랩했다"며 "당시에는 '주간 야구'라는 잡지가 있었다. 내 기사와 사진이 잡지에 실리면 엄청나게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입단 초기에는 홈런을 기록한 다음 날 새벽에 신문을 직접 사 읽었다. 내 기사가 나오면 집에 챙겨간 적도 꽤 있다. 그때는 인터넷 없이 유니텔-하이텔 시대였으니까"라고 웃었다. 


②1997년 12월 25일 『이승엽 MVP냐 IMF냐』1999년 12월 20일 『설마 이승엽』
 

입단 3년 차였던 1997년 타율 0.329 32홈런 114타점을 올린 이승엽은 '사자 군단'의 중심이자 '라이언킹'으로 통했다.
선수 연봉은 늘 비시즌 가장 큰 이슈다. 특히 당시에는 FA(프리에이전트)가 없어 구단과 선수의 연봉 줄다리기가 더욱더 심했다. 이승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당시 외환 위기까지 겹쳐 연봉 협상은 더욱더 진통을 겪곤 했다. 1997년 12월 25일 "성적만큼은 받아야겠다"는 이승엽의 입장과 "지금은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IMF 시대다"는 삼성 구단의 입장이 반영된 '이승엽의 연봉 잣대 MVP냐, IMF냐'는 기사가 본지 1면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승엽은 "당시 정말 국가 경제가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내가 연봉 협상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다른 선수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마지막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구단마다 이런 분위기가 퍼져 있어, 선배들은 스타 후배에게 '마지막에 사인하라'고 강조하던 시절이었다. 이승엽은 "야구만 해도 힘들었는데 야구 이외의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는 등 내가 감당하기에 벅찬 부분도 많았다. 스트레스도 컸다"고 한다.

1998년 9월 11일 『우즈 35호, 이승엽 게 섰거라』


1998년, KBO 리그가 역사상 가장 뜨거운 홈런 경쟁이 펼쳐졌다. 이승엽과 타이론 우즈였다. 승자는 42개를 친 우즈였다. 이승엽은 38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올스타전 개최 전까지 내가 우즈에게 앞섰는데 결국 역전을 당했다. 실패를 통해 많은 걸 얻었다. 정말 좋은 공부가 됐다"며 "우즈한테 이기려고 더 열심히 연습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승엽은 한국 야구의 새 역사를 썼다. 우즈를 제치며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동시에 최초로 50홈런 시대를 열었다. 이승엽은 "당시 홈런 54개가 내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치라고 여겼다. 그런데도 아쉬웠다. 홈런 1개만 더 쳤다면 일본에 귀화환 왕정치가 1964년에 기록한 아시아 홈런 기록(55개)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1999년 5월 25일 30-50 홈런 축제


인터뷰 도중에 이승엽은 "일간스포츠에서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홈런 기록에 상금을 내걸었는데 내가 받았다"며 먼저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당시 일간스포츠는 1999년 5월 25일 1면을 통해 '30홈런-50홈런-50세이브'를 가장 먼저 달성하는 선수에게 사상 최대의 상금과 경품을 걸었다. 전년도 홈런왕 경쟁을 펼친 이승엽과 우즈가 유력 상금 후보였다. 당시 보도 시점을 기준으로 이승엽은 20홈런, 우즈는 13홈런을 기록 중이었다. 결국 이승엽이 30홈런·50홈런 상금 300만원·2000만원을 싹쓸이했다. 당시 리그 평균 연봉이 3757만원이었다. 이승엽은 1999년 6월 24일 대구에서 열린 LG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0홈런을, 1999년 9월 2일 대구 LG전에서 50홈런을 선점했다.
 

1999년 12월 23일 『병영 스타 이승엽 왔다』1999년 11월 15일 『박찬호-이승엽 만났다』


이승엽은 1999년 홈런 신기록을 작성한 뒤 삼성 라이온즈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국구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젯거리였다. IMF 시대에 희망을 안겨준 박찬호와의 만남, 또 군부대 방문 역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이승엽은 "새벽 6시에 집, 또는 원정 숙소 전화벨이 자주 울렸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오거나 기자(당시에는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렀다.)들이 방으로 찾아왔다. 스트레스가 엄청났다"고 회상했다. 또 "경기를 마치고 팬들이 엄청 많이 기다리고 있어 동료 선수들과 함께 구단 버스로 이동하지 못하고, 구단 관계자의 개인 차를 타고 움직이곤 했다"고 경험담을 소개했다.


홈구장이었던 대구 시민야구장보다 원정 잠실야구장을 빠져나오기 더 힘들었다. 이승엽은 "잠실구장에선 구단 버스를 타기 위해 경호원의 보호 아래 이동 중에 모자를 자주 뺏겼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었다. 당시에는 잠실구장 3루 측 통로를 통해 20~30m를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며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스트레스도 매우 컸다"고 떠올렸다. 정확히 20년이 흐른 지금, 이승엽은 "그래도 그때 50홈런도 치고 정말 행복했다. 잘해도 못해도 엄청나게 큰 사랑을 받았다"고 웃었다. 
 

⑧1999년 11월 12일 『이승엽 야구 포기』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 중이던 이승엽은 일본 도쿄에서 "박흥식 코치가 물러나면 나도 야구를 그만두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당시 삼성에는 신임 사령탑을 발표한 이후 새 타격 코치 영입설이 나돌았다. 박흥식 KIA 감독대행이 당시 삼성 타격 코치로 이승엽을 홈런 타자를 이끈 지도자였다. 이승엽은 "구단 사장님이 일본에 있던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등 당시 구단에 난리가 났었다"며 "사실 내 입장에서는 '54홈런 타자를 이끈 타격 코치를 바꾸면 나는 어떡하라는 말인가' 생각할 만큼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현역 유니폼을 벗은 그는 "내가 이런 과격한 발언도 했었구나. 나도 정말 미쳤네
"라며 "밖에서 바라보면 '미친X'으로 여겼을 것 같다"고 웃었다.
 

2003년 10월 3일『56호』


이후 홈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승엽은 2003년 전국 야구장에 잠자리채 열풍을 몰고 왔다. 2003년 10월 2일 대구 롯데전, 그는 드라마처럼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아시아 개인 한 시즌 최다홈런(56개)을 쏘아 올렸다. 당시 1~8면까지 이승엽의 홈런 소식으로 신문이 도배됐다. 또 노무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이승엽은
"전체적인 시즌으로 놓고 보면 2003년보다 1999년에 더 잘 풀렸다"면서 "2003년에는 초반에 홈런이 간간이 나왔고, 1할 타율까지 기록한 적 있다"고 떠올렸다. 그래도 "1999년 56호 홈런에 도전한 경험이 있어 2003년 50홈런을 때린 뒤 잠시 주춤했지만 결국에는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 과정을 회상했다.

 
⑪2003년 11월 17일『애너하임-LA 승엽 전쟁』⑩2003년 11월 27일 『폭탄 선언』


해외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본이냐 미국이냐, 최종 선택이 관심사였다. 이승엽도 56호 홈런을 친 2003년 10월 2일에 "이제는 좀 더 큰 곳에서 뛰고 싶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이승엽에게 관심을 두는 미국과 일본 구단, 또 구체적인 금액까지 대대적으로 앞다투어 보도됐다. 당시 1면 헤드라인을 보면 '애너하임-LA 승엽 전쟁' '일본 롯데 구단주 지시, 이승엽 잡아라 100억 올인' '다저스·시애틀 돌연 입장 변화, 승엽 도장 찍자' 등이었다.

 

⑫2003년 12월12일 『150억 눈물』


2003년 12월 12일. 그의 행선지가 결정됐다. 이승엽은 눈물을 흘리며 일본 지바 롯데 입단을 선택했다. 이승엽도 당시 해외 진출 과정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리고 '눈물의 의미'에 대해 가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진출을 선언한 '이승엽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 결코 사실이 아니다. 갑자기 일본 진출로 
방향을 틀었던 과정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일간스포츠에서 보도한 내용(삼성 막판 천문학적 베팅에 흔들, '돈보다 새로운 도전' 고뇌의 선택)이 정확한 팩트다. 삼성에서 내민 조건이 정말 좋았다. 상상도 못 할 천문학적 금액과 조건을 제시했다. 당시 해외 무대 도전 의사가 컸는데 에이전트랑 논의하며 삼았던 기준과 달리 미국에서 제시한 조건이 워낙 안 좋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고, 아버지가 곁에서 어머니를 간호하셨다. 꿈을 위해 (미국에 진출하는 것은) 여러모로 현실성이 떨어졌다. 나는 이미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상태로 부모님께 생활비도 드려야 했다. 그래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상) 삼성에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에서 제의가 왔다.
이미 '미국에 진출하지 않으면 무조건 삼성에 남겠다'고 한 터라 팬들도 삼성 구단도 실망이 컸다. 기자회견에서 '9년 간 가족같이 대해준 삼성…'이라고 딱 읽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 미국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 아닌 가족처럼 대해준 팬들과 구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그랬다."

 

잠시나마 과거 여행을 다녀온 이승엽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해외 무대 진출 전까지 정말 관심을 많이 받았다. 나와 동년배인 40대, 그리고 50~60대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김식·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ongang.co.kr
사진=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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