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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이 없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그 한마디

기자
송미옥 사진 송미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06)  

올해도 역시나 가을이 오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도 역시나 가을이 오고 있다. [중앙포토]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이 오는 소리를 꽃들은 어찌 아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기하다. 마당의 국화는 자기들만의 축제를 준비하느라 곧 터질 듯한 봉우리를 애써 여미고, 코스모스는 떠난 님 기다리는 듯, 긴 모가지를 빼고 먼 길목을 기웃거린다. 가을, 나이로 치면 육십갑자를 돌아온 내 나이이고 몸은 갱년기를 이겨낸 지친 전사의 모습이며 마음은 낙엽이지만 그래도 색동옷 입은 18세 소년이다.
 
가을은 책 속을 여행해도 좋은 계절이다. 도서관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을 보며 여러 권을 들고 와 책상 위에 쌓아 놓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장터 구경하는 노인네처럼 이책 저책을 펼쳐보며 설렁설렁 책장을 넘긴다. 눈길 가는 책 속의 한 구절을 꺼내어 가을 스토리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저번에도 소개한 박경리의 토지를 또 끄집어 든다. 한 대목에서 여러 번 강조해서 읽어보는 구절이 있다. “삶에 여한이 없습니다.” 가을이 올 때마다 몇 번이나 되새기게 되고, 남은 생을 잘 살아가도록 방향을 알려주는 말이다. 태어나 살면서 거미줄 같이 짜인 인생이란 줄에 걸려 보석도 줍고 돌도 줍고, 또 어느 땐 넘어지고 크게 다쳐도 보며 이제까지 살아온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이 험한 세상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참 신기하고 대견하다.
 
누군가 말해준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인 ‘도망치거나, 방관하거나, 부딪혀 보거나’ 중에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해 달려왔는가를 생각해 본다. ‘여한이 없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든 매 순간 치열하게 부딪치고, 후회 없이 살다가 언제라도 그날이 오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오래 살아오신 어른들은 모두 비슷한 말을 한다. 살아 보니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 너무 허무하다고, 인생은 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없고 원대하고 창대한 목표를 잡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내 나잇대가 돼서야 깨닫게 되는 말이다.

 
 
살다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지름길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빙빙 돌아가는 버스를 탄 나에게 버스 기사는 말했다.
 
“버스 잘못 타서 뱅뱅 도는 기 한 두 사람이겄소?”
“내가 가려고 한 도착지를 가느냐 안가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겄소?”
 
그러고 보니 나는 방향도 없이 무작정 달리기만 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창대한 목표를 잡지도 말고 꽃도 보고 산도 보며 천천히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야 할 가을 같은 우리 나이 아닐까? 
 
멋쩍어하는 나에게 기사는 미소 지을 말 한마디 덧붙였다.
“그라고 보소, 같은 요금 내고 이리 오래 태워주는 버스 없으요. 암만. 허허허.”
 
봄 여름 가을 겨울 소풍 가듯 살아온 인생길에, 다시 돌아온 이 가을을 가슴에 꼭 안아본다. 그리고 이 가을, 방향을 잘 잡아서 굽이굽이 아름다운 산천을 천천히 돌아오는 멋진 가을 여행도 계획해 본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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