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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 뉴욕서 배달된 하소연 1탄···야비한 갑질에 텃밭 때려치웠다

빨강의 어머니는 초록일까. 땡볕이 독이 오를 무렵 진초록 고추는 슬금슬금 빨강을 내놓는다. 뒤늦게 연일 비가 내렸다. 말리던 고추를 전기장판 위로 옮겼다가 맑은 날 다시 베란다로 내놨다.

빨강의 어머니는 초록일까. 땡볕이 독이 오를 무렵 진초록 고추는 슬금슬금 빨강을 내놓는다. 뒤늦게 연일 비가 내렸다. 말리던 고추를 전기장판 위로 옮겼다가 맑은 날 다시 베란다로 내놨다.



낯선 메일이 왔다. 지난 4월13일이었다. 손병욱, 모르는 분이었다. 세계가 초 단위로 엮이는 세상이지만, 직항으로 14시간이나 걸리는 태평양 너머에서 온 소식이라 눈길을 끌었다. 뉴욕 도심에서 오래 일구던 텃밭을 빼앗겼다고 했다. 무슨 곡절인지 궁금했다. 메일과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뉴요커들의 일상을 볼 수 있었다. 그간 오고간 이야기를 손 선생이 말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젊어서 이민을 가 미국 생활 37년째입니다.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 일했지요. 뉴욕에서 텃밭농사를 10여년 지었습니다. 뉴욕에는 조그만 텃밭이 100개가 넘습니다. 커뮤티니 가든(community garden), 한국의 주말농장이라고 보면 되지요. 구글로 찾아보니 맨해튼에만 23군데가 있네요. 뉴욕시 공원국 관할입니다. 저는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살아요. 맨해튼과 퀸즈 사이에 있는 작고 기다란 섬인데 행정구역은 맨해튼 소속이지요. 아마존이 여기로 들어오려다가 반대가 심해 무산됐어요. 우리 동네 커뮤니티 가든에는 밭이 132개예요. 하나가 대략 4×4 미터 정도입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데 1년에 사물함 사용료가 20달러 텃밭 사용료가 40달러이니 거저지요.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5개의 자치구가 있다. 브롱스만 빼고 다 섬이다.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5개의 자치구가 있다. 브롱스만 빼고 다 섬이다.

중간에 보이는 기다란 섬이 루스벨트 아일랜드. 오른쪽이 맨해튼 왼쪽이 퀸즈 롱 아일랜드 시티

중간에 보이는 기다란 섬이 루스벨트 아일랜드. 오른쪽이 맨해튼 왼쪽이 퀸즈 롱 아일랜드 시티

 
텃밭을 얻으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저는 바로 구했어요. 가든 클럽 회장인 론이랑 친한 덕을 봤죠.(가든 클럽은 회원들이 매년 회장과 임원들을 투표로 뽑아요. 뉴욕시 전직 마약담당 형사였던 론은 10년 넘게 회장을 한 뒤 80세가 넘어서야 힘들다며 물러났지요.) 론이 어느 날 너 텃밭하고 싶니? 묻기에, 그래 했더니 마침 나가는 회원이 있다더군요. 나중에 누가 이걸 문제 삼으니 론이 아 그 친구는 3년 전에 리스트에 올려놨다고 했대요. 회장이 어느 정도는 재량권이 있거든요. 대기자가 많아 준회원을 두고 있어요. 정회원의 밭을 같이 가꾸며 회비도 내지요.  
가든 클럽 전임 회장 론. 뉴욕시 마약담당 형사였다.

가든 클럽 전임 회장 론. 뉴욕시 마약담당 형사였다.

일광욕 하고 채소도 키우려 시작한 텃밭. 홈디포에서 자재를 사와 벤치와 탁자로 만들었다.

일광욕 하고 채소도 키우려 시작한 텃밭. 홈디포에서 자재를 사와 벤치와 탁자로 만들었다.

 작물 무성한 텃밭

작물 무성한 텃밭

 
여기 사람들은 죄다 꽃만 가꾸고, 다른 것은 기껏해야 토마토나 허브 정도를 심어요. 저는 먹는 채소 위주로 심었어요. 사람들이 보고서 많이 따라하더군요. 한국 오이 모종도 많이 나눠 줬지요. 제가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그랬는지 몇몇이 시기와 모함을 시작했어요. 저랑 친한 유태인 친구를 엮어서요. 여기서 대학 다닐 때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직장이나 사회에서 잘나가면 인종차별이 시작돼요.  
 
주말 텃밭에서는 항상 회원들의 바비큐 파티가 열린다.

주말 텃밭에서는 항상 회원들의 바비큐 파티가 열린다.

작은 음악회도 열고

작은 음악회도 열고

새 회장 후보로 카렌과 에이프릴이 나왔어요. 둘 다 여자인데 카렌은 중국계예요.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며 봉사도 많이 했지요. 론을 비롯한 친구들이 카렌을 밀었지만 백인 일색인 회원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회장이 된 에이프릴은 임원들을 주로 자기편 여자들로 채웠어요. 무슨 수단을 썼는지 다 그 앞에서 빌빌대더군요. 아이고~ 동네 텃밭 회장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회장이 바뀐 뒤 그 팀이 갑질을 시작했어요. 
캐나다 거위들한테 고양이 밥을 나눠주는 카렌. TV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중국인 역할을 많이 하는 배우다.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나간다.

캐나다 거위들한테 고양이 밥을 나눠주는 카렌. TV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중국인 역할을 많이 하는 배우다.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나간다.

한때 유행했던 놀이를 하는 카렌과 론.

한때 유행했던 놀이를 하는 카렌과 론.

 
새 회장이 갑자기 텃밭 앞에 회원들 사진을 걸자고 하더군요. 게다가 음주 금지, 흡연 금지. 출입시간 제한까지 하겠대요. 제가 친구들한테 그랬지요, 아니 얘들이 미쳤나? 여기는 더 이상 아메리카가 아니다. No more free country. 저는 텃밭 가꾸며 다른 사람들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대부분이랑 친했거든요. 어느 날 일을 하고 맥주를 마시는데 여자 몇이 오더니 마시면 안 된대요. 그래서 어이! 우리는 농부가 아니야. 밭일만 끝내고 집에 가는 농부가 아니라고. 이건 내 취미 생활이고 여기는 내 쉬는 공간인데 니가 뭔데 나한테 그래? 저만이 아니라 친구들이 다 열 받았지요.
텃밭에서 얻은 맥주 안주.

텃밭에서 얻은 맥주 안주.

 
론이 자기 아파트로 모이자고 했어요. 회칙에 없는데 준회원 에이프릴이 어떻게 회장이 됐지? 무슨 야료가 있는 거 아냐? 이거 안 되겠네…. 방법을 의논했지요. 클럽 임시총회를 열자 회원끼리 설전이 벌어졌지요. 결국 회칙에 따라 에이프릴이 떨려나고 다른 사람을 뽑았는데 그쪽도 에이프릴 일파였어요.
밭에서 본 이스트리버 너머 맨해튼.

밭에서 본 이스트리버 너머 맨해튼.

 
묘한 시기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내 친구 본이 만든 작은 창고가 있어요. 전기를 끌어오고 냉장고도 갖다놨지요. 겨울에는 그 안에서 맥주파티도 하고 노는 방이지요. 이게 잿더미로 변해요. 금요일 밤 11시 반에 불이 났다는데 그 조금 전에 에이프릴이 사는 아파트에서 나가는 게 CCTV에 찍혔대요. 그 여자가 텃밭 옆 야구장 바로 건너에 사니 걸어서 2,3분이면 오지요. 어떻게 된 건지 이 일은 흐지부지 끝납니다. 다친 사람도 없고 얼기설기 지은 창고라서 그랬는지. 그런데 나중에 이 일이 저한테 불똥이 튀어요.
맥주를 매우 좋아하는 본의 텃밭은 내 밭 바로 앞이다.

맥주를 매우 좋아하는 본의 텃밭은 내 밭 바로 앞이다.

본이 만든 텃밭 창고. 겨울엔 친구들의 놀이터.

본이 만든 텃밭 창고. 겨울엔 친구들의 놀이터.

잿더미가 된 창고

잿더미가 된 창고

 
회장이 바뀌었지만 걔네 일당의 시비는 여전했어요. 그런데 유독 나한테만 심하게 굴어요. 그러건 말건 내가 텃밭에서 재미나게 노는 게 얄미웠는지 배가 아팠는지. 하루는 맥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동네 경찰이 와서 잡혀갔어요. 술 마시고 무단침입 했다는 혐의로 티켓을 주더군요. 이건 무조건 법정에 가야합니다.
 
평일에는 문을 잠가놓는 텃밭 입구.

평일에는 문을 잠가놓는 텃밭 입구.

맨해튼에 있는 법원에 가기 전에 자료를 준비했어요. 뉴욕은 공원이나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술을 못 마셔요. 판사한테 텃밭 울타리 사진하고 출입문에 자물통이 달려있는 사진을 보여줬지요. 여기는 열쇠를 가진 회원만 출입하는 곳이지 공공장소가 아니다, 난 돈을 내는 정회원이라고 했지요. 무단침입 혐의도 해명했어요.  
걔들이 출입허용 시간대를 dawn to dusk 라고 정해놨어요. 일몰(sunset) 시간에서 한 시간 이상이 지나야 dusk예요. 그날 dusk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여줬습니다. 판사가 기각(case dismissed!) 하더니 웃으며, 그래 텃밭에서 뭐를 키우슈? 하고 물어요. 잠시 농담 비슷한 얘기를 하다가 집에 왔지요. 다음에는 온실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어요. 어이, 다른 애도 온실이 있는데? 니 온실은 뭘 키우려는 게 아니라 맥주 마시고 노는 데잖아? 저기 저 구석에 키우는 거 안 보여? 네 밭이나 신경 써, 응? 튀어나오는 욕을 참으면서 최대한 점잖게 말했지요.  
온실 안의 장작 난로.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이걸 보더니 또 너 소방서에서 허락받았어? 이거 원래 야외에서 쓰라고 만든 캠핑용이야. 아마존에다 물어봐. 소방서 허가받고 써야하는지. 또 티격태격.

온실 안의 장작 난로.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이걸 보더니 또 너 소방서에서 허락받았어? 이거 원래 야외에서 쓰라고 만든 캠핑용이야. 아마존에다 물어봐. 소방서 허가받고 써야하는지. 또 티격태격.

출입시간 바꿔치기 꼼수를 부린 안내판. 어느 날 가보니 출입 시간 dawn to dusk 를 오전 6 시 30 분에서 오후 8 시 30 분으로 바꿔 놨다. dusk 는 sunset 에서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고 해서 그랬을 테다 .

출입시간 바꿔치기 꼼수를 부린 안내판. 어느 날 가보니 출입 시간 dawn to dusk 를 오전 6 시 30 분에서 오후 8 시 30 분으로 바꿔 놨다. dusk 는 sunset 에서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고 해서 그랬을 테다 .

 
 
그 후로 동네경찰이 두 번 더 왔어요. 한번은 다른 회원들은 놔두고 저랑 다른 친구 하나만 잡아갔어요. 법원에 가니 같은 판사더군요. 지난번과 비슷하게 끝났어요. 마지막은 친구들 셋이랑 넷이 놀고 있을 때였지요. 우리가 뭘 잘못했냐? 무단침입(trespass)이야. 텃밭 문이 잠겨있는데 어떻게 들어왔어? 담 넘어왔어. 그러면 니네가 무단침입 한 거네. 경찰 하나가 당황해 하더니 본부에 무전기로 뭐라 뭐라 해요. 조금 있다가 차가 한대 더 와서 죄다 잡혀갔어요. 거기서 사이좋게 티켓을 한 장씩 나눠받았어요. 누가 신고 했냐고 물었더니 사무실에 정식으로 신청을 하래요. 나중에 사건보고서(incident report)를 받아보니 역시 그쪽 짓이었어요. 신고자, 신고 받은 시간부터 출동시간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신고한 자가 텃밭회장을 사칭했더군요. 더 말하기 싫었어요. 텃밭 때려치울 거다, 나도 니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했지요.  
마지막으로 잡혀간 멤버입니다. 한 친구가 빠졌다. 가운데가 손병욱 선생.

마지막으로 잡혀간 멤버입니다. 한 친구가 빠졌다. 가운데가 손병욱 선생.

클럽 회칙에 텃밭을 제대로 관리 안 하거나 잘못을 세 번 이상 하면 퇴출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저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법원에서 다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정나미가 떨어졌어요. 밭 아니라도 할 일 많고 놀 거리도 많거든요. 속이 시원하데요….
 
(‘뉴욕에서 온 편지’는 2탄으로 이어갑니다. 사진: 손병욱 선생 제공)  

 
 
내밭 들어가는 길가에 핀 유홍초. 메꽃과 같은 집안이다.

내밭 들어가는 길가에 핀 유홍초. 메꽃과 같은 집안이다.

 
무 배추 심고 나니 내 밭에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가을장마에 녹아버린 모종 자리에 20일무 씨앗을 넣었다. 그런데 고라니가 다시 나타났다. 이놈을 어쩐다.
한창 자라기 시작한 배추 사이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 이놈이 노리는 목표는 무 잎이다.

한창 자라기 시작한 배추 사이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 이놈이 노리는 목표는 무 잎이다.

 
풀을 뽑다 보니 땅강아지가 툭 튀어나와 정신없이 내뺀다. 집어들었더니 손가락을 깨물고 난리도 아니다. 가지고 놀다가 내려놓으니 흙속으로 쏙 들어간다.

풀을 뽑다 보니 땅강아지가 툭 튀어나와 정신없이 내뺀다. 집어들었더니 손가락을 깨물고 난리도 아니다. 가지고 놀다가 내려놓으니 흙속으로 쏙 들어간다.

서해안을 훑고 지나간 태풍 때 쓰러진 소나무. 내 밭은 큰 피해가 없다.

서해안을 훑고 지나간 태풍 때 쓰러진 소나무. 내 밭은 큰 피해가 없다.

이제 가을상추 전성기다. 도톰하게 살이 올라 씹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이제 가을상추 전성기다. 도톰하게 살이 올라 씹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내 밭 옆에 있는 부추밭. 잘라낸 왼쪽도 열흘이면 다시 오른쪽만큼 자란다.

내 밭 옆에 있는 부추밭. 잘라낸 왼쪽도 열흘이면 다시 오른쪽만큼 자란다.

내 가방에 올라앉아 세상구경하는 방아깨비 모자. 툭툭 쳐도 꿈쩍도 않더니 풀숲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내 가방에 올라앉아 세상구경하는 방아깨비 모자. 툭툭 쳐도 꿈쩍도 않더니 풀숲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신통방통하게 거의 다 싹이 텄다. 3분의1쯤은 솎아냈는데 다시 그만큼 솎아줘야겠다.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신통방통하게 거의 다 싹이 텄다. 3분의1쯤은 솎아냈는데 다시 그만큼 솎아줘야겠다.

 
철없는 청포도. 다 익어 따냈는데 뒤늦게 다시 몇 송이가 자란다. 한 알 따서 깨물었다가 아이고 퉤퉤.

철없는 청포도. 다 익어 따냈는데 뒤늦게 다시 몇 송이가 자란다. 한 알 따서 깨물었다가 아이고 퉤퉤.

 
쥔장네 늙은 호박. 길기도 하지.

쥔장네 늙은 호박. 길기도 하지.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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