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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00m 산골 마을, 2만 관객 몰리는 연극 성지

지난 7일 일본 도야마현 도가 연극촌 원형 야외무대에서 공연된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의 ‘세상의 끝에서 안녕’. 이 연극촌을 조성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작품이다. [사진 SCOT]

지난 7일 일본 도야마현 도가 연극촌 원형 야외무대에서 공연된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의 ‘세상의 끝에서 안녕’. 이 연극촌을 조성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작품이다. [사진 SCOT]

달빛이 조명이고 풀벌레 소리가 음향이었다. 해발 800m 고적한 산동네에 세계 16개국에서 모인 27개 팀 배우들의 포효가 울렸다. 수백 년 전 사무라이 은거지에서 전 세계 예술인들이 주목하는 연극의 성지(聖地)로 탈바꿈한 도야마(富山)현 난토(南礪)시 도가(利賀) 연극촌.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80)의 반세기 꿈과 열정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1976년 조성 일본 ‘도가 연극촌’
주민 400명 동네가 세계적 명소로
올해 16개국 참가 연극올림픽 열려
한국 극단 자유 ‘전통극’ 큰 호평

지난 6~8일 이곳을 찾았을 때 8월 23일부터 한 달 여정으로 막 오른 ‘제9회 연극올림픽’(Theatre Olympics)이 한창이었다. 동·서양 예술가들의 교류를 통해 21세기 공연예술 방향을 모색하는 축제다. 스즈키 다다시 외에 로버트 윌슨, 유리 류비모프, 월레 소잉카, 하이너 뮐러 등 세계적인 연출가·극작가가 주도해 1995년 그리스에서 처음 열렸다. 2~3년 주기로 여러 나라에서 개최됐고 2010년 서울에서도 열렸다. 올해는 일본과 러시아 공동 주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동시 진행된다. 한국은 53년 역사의 극단 자유가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극작 김정옥, 연출 최치림)를 들고 도가 마을로 왔다.
 
“집이 오사카인데 심야버스 타고 도야마에 도착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왔어요. 친구와 함께 텐트 치고 숙식하며 2박 3일간 연극에만 푹 빠져 지낼 생각입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긴키대 1학년(무대예술전공) 미시마 미오의 말이다. 이번 연극올림픽 기간 일본 각지와 세계 곳곳에서 몰려드는 관람객은 약 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면적 12만4000㎡(약 3만7500평), 인구 400명에 불과한 외진 산골 속 6개 상설극장이 밤낮으로 실험적인 공연예술로 들끓는다.
 
극단 자유가 6일 제9회 연극올림픽에서 공연 한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 강혜란 기자

극단 자유가 6일 제9회 연극올림픽에서 공연 한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 강혜란 기자

‘이름없는…’의 공연장은 100년 넘은 전통 가옥을 손질한 ‘도가산보’였다. 겨울에 눈이 2~3m 쌓이기 때문에 갓쇼 즈쿠리(경사가 심한 맞배지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사람인(人) 형태로 지탱하는 지붕 아래 툇마루처럼 넓은 공간이 생기는데, 이곳이 무대로 쓰였다.
 
“오늘은 우리들 자신의 얘기를,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굿으로 꾸며 볼까 합니다. (중략) 바람의 속성을 물려받은 우리에겐 보금자리도 없고 죽어서 무덤도 없습니다.”(광대 역 선종남)
 
‘이름없는…’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천대받는 사당패를 통해 질박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극중극 형태의 작품이다. 사물놀이·마당놀이에다 장례식장 상주를 웃기는 ‘다시래기’ 놀이까지 결합돼 한국 전통 색채가 물씬하다.
 
스즈키 다다시

스즈키 다다시

1986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연극제 때 초연한 뒤 일본 나들이는 33년 만. 몸짓으로 통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엔 기술 발달에 힘입어 일본어 자막까지 실시간 제공됐다. 다만 극 초반부에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일제 강점기 혼란상이 담겨 있어 경색된 한일 관계 속에 객석 분위기가 딱딱해지지 않을지 우려됐다.
 
하지만 관객들은 광대들 장단에 맞춰 손뼉을 치며 동참했고 두 차례 공연은 객석 계단까지 메운 채 성료됐다. 6일 공연 후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간 다카유키는 “한국 토속 색채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라 더욱 흥미로왔다. 연출에 있어 (이야기 사이의) 과감한 생략이 두드러졌다”고 평했다. 한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런 시기일수록 더 많은 문화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바람도 비쳤다. 공연을 본 미시마 미오는 “객석을 넘나들며 흥을 일구고 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독특했고 (시적인) 대사가 때로 눈물 날 듯한 울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연극인이 교류하는 국제적인 장소, 좋은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작업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40여년간 도와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고대 그리스풍의 원형 야외극장(이소자키 아라타 설계)에 백발의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가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7일 밤 연극촌 상주 극단인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의 대표작 ‘세상의 끝에서 안녕’이 공연된 직후였다. 전후(戰後)의 고단한 삶과 불합리한 체제 비판을 희극적으로 꾸민 무대에 700여 관객이 숨죽인 채 몰입했다.
 
이번 행사는 관·재계의 적극 후원으로 이뤄졌다. 세계 최대 지퍼생산기업 YKK그룹을 포함해, 200여 기업이 동참했고 도야마현과 난토시는 물론 일본 문화청과 국제교류기금 등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지역을 세계에 알리고, 지역민들에겐 문화를 누리게 할 기회”(다나카 미키오 난토시장)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밖에도 ‘도가 국제 예술 페스티벌’ ‘도가 아시아 예술제’, 그리고 SCOT 연례행사인 ‘SCOT 여름 시즌’ 등으로 산중 마을은 연중 북적인다.
 
“나는 연극을 위해 돈을 달라고 한 적 없다. 일본을 변화시키고 싶은 수단으로 연극을 하니까 지원해달라 했고, 그게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1976년 이곳에 처음 둥지를 틀 당시 스즈키는 ‘신흥종교집단 아니냐’ ‘적군파 잔당이 숨어든 것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고 한다. “모두가 도쿄로 몰리는데, 나는 이곳에서 세계로 뻗어가고자 했다.” 37세 패기만만했던 연출가의 야심이 이제 세계의 젊음을 일본 벽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도가(일본)=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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