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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도 없는데 쩔쩔매는 게 예의? 그건 중증 직업병

기자
박헌정 사진 박헌정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46) 

오전 일과 후 삼삼오오 자연스럽게 점심 먹으러 이동하는 직장인들. 권위적이고 경직된 기업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상사 앞에서는 쩔쩔매야 예의바르다고 생각하는 조직이 꽤 있는 것 같다. [사진 박헌정]

오전 일과 후 삼삼오오 자연스럽게 점심 먹으러 이동하는 직장인들. 권위적이고 경직된 기업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상사 앞에서는 쩔쩔매야 예의바르다고 생각하는 조직이 꽤 있는 것 같다. [사진 박헌정]

 
열두 시, 직장인들이 몰려나온다. 밝은 표정으로 삼삼오오 지나가고 나면 잠시 후 근엄한 표정의 중년 남자와 그보다 젊은 두어명이 함께 지나간다. 젊은 사람이 옆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인 채 편치 않게 따라가는 걸 보니 ‘높은 분’ 모시고 점심 장소로 가는 중이다. 직원들이 먼저 가서 “넌 여기, 넌 저기…”하며 자리 잡고 앉아있으면 뒤늦게 가서 “다 왔나?”하곤 할아버지처럼 ‘끙!’ 소리 내며 가운데 앉겠지.
 
나도 그랬다. 아이들은 커나가고 일은 우박처럼 쏟아지고 진급 경쟁도 치열하던 과장 때쯤일까, 높은 분 옆에 착 달라붙어 잘 들리지도 않는 말 들으려 애썼고, 아무 말 없으면 심기가 불편한가 싶어 긴장했다.
 
그런데 퇴직 후 “왕년에 잘 나갔다”던 사람들이 기운 없이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직장 세계의 그런 ‘위계질서’, 즉 남의 눈에는 다 똑같은데 자기들끼리 위아래 정해 폼 잡고 그게 바깥세상에서도 인정받을 것 같은 착각과 자신감 속에 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다. 부질없다.
 
 80~90년대에 직장인들의 현실과 사무실 풍경을 재미있게 그려내 큰 호응을 얻었던 KBS 2TV 드라마 '손자병법'. 대기업 간부 이장수 과장(오현경 분)은 쩔쩔매는 직장인의 전형을 코믹하게 보여주면서 아랫사람 앞에선 으스대기도 잘하던 인간적인 캐릭터였다. [사진 유튜브 캡처]

80~90년대에 직장인들의 현실과 사무실 풍경을 재미있게 그려내 큰 호응을 얻었던 KBS 2TV 드라마 '손자병법'. 대기업 간부 이장수 과장(오현경 분)은 쩔쩔매는 직장인의 전형을 코믹하게 보여주면서 아랫사람 앞에선 으스대기도 잘하던 인간적인 캐릭터였다. [사진 유튜브 캡처]

 
점점 나이 먹을수록 알게 되었다. 그렇게 ‘권위 있게’ 무게 잡던 ‘높은 분’ 마음속에는 고임금 노동자로서의 부담감과 자연인으로서의 절박함뿐임을. 머릿속엔 경영현안이나 기밀 대신 ‘다음 주엔 사장한테 한번 깨지겠지?’, ‘자식들, 어제 술 마셨는데 웬 돈까스?’, ‘거기서 김실장 만나면 어떡하지?’ 같은 게 들어있을지 모른다. 높은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다음 자리나 은퇴 후 걱정에 사로잡히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업무시간은 물론이고 밥 먹으러 갈 때조차 그 옆에 바짝 붙어 안절부절못하는 직원들을 보면, 대체 왜 저럴까 싶다가도 얼마나 절실하고 기회가 없으면 저러겠나 싶어 애처롭다. 그나마 요즘은 넥타이도 풀고 좀 자유롭게 입지만 예전에는 이 더운 날씨에 정장 차림으로 그렇게 따라다녔으니….
 
한편으로는 조직의 힘도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자영업자보다 적게 일하고, 고민과 스트레스도 며칠 단위로 정리해가며 살지만 그래도 ‘조직’이기 때문에 큰 파도를 헤쳐나간다. 그러니 ‘조직’에서 그 정도 조바심과 안절부절쯤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자영업자는 진상고객 만나면 간 빼주며 더한 고통도 겪는데.
 
회사에는 말 잘 듣는 직원이 많다. 조직이란 게 특별한 일 없다고 해서 사람을 놀릴 수는 없으니 가끔 ‘교육’을 구실로 바보 같은 지시나 행사를 한다. 그러면 투덜대며 마지못해 따르는 직원도 있고, “네” 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직원도 있다. 어찌 그리 ‘무의미한 의미’에 활기차게 공감할 수 있을까. 대개 그들을 ‘성실’ 또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은 자기계발서의 핵심어, 그러니 상도 받고, 그대로 직진해서 승진도 일찍 한다.
 
그런 직원은 입사 첫날부터 드러난다. 상사 잘 따르고, 리액션 잘하고, 좀 편히 있어도 될 사석에서까지 조직의 ‘공식입장’ 반복하고…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순수하고 열렬한 호응 그 자체다. 조직은 그런 사람을 ‘인재’라며 은근히 그쪽으로 유도하고 경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지워가면서 그런 식으로 ‘긍정’을 연출해가며 사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그랬는데 더 적극적인 사람들이 워낙 많아 별 효과를 못 봤다.
 
젊은 세대에게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처럼 안정된 직장은 ‘꿈’이다. 우리 세대에게도 그랬다. 그렇게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필요 이상으로 쩔쩔매며 살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 pixabay]

젊은 세대에게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처럼 안정된 직장은 ‘꿈’이다. 우리 세대에게도 그랬다. 그렇게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필요 이상으로 쩔쩔매며 살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 pixabay]

 
직장인에게 자주 나타나는 병이 있다. 기운 없고 가슴 뛰고 핸드폰 소리에 놀라고… 한 마디로 ‘쩔쩔매는 병’이다.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한 것은 좋지만 자칫하다 버릇 되면 상황과 관계없이 강자에게 늘 굽신대는 ‘쩔쩔매는 병’에 걸린다. 그 병은 전염성이 무섭다. 쩔쩔 맨 대상, 즉 상사에게 ‘꼰대병’으로, 고객에게 ‘갑질병’으로 변이되어 전염된다.
 
잘못도 없이 굽신대고 쩔쩔매며 그것을 공손함이나 예의라고 착각하거나 ‘그쪽 입장’ 운운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관대함으로 포장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오판하게 한다. 한쪽이 너무 낮추면 다른 쪽은 너무 올라가니 적당한 관계를 착각하여 상사는 자기의 권위를 과신하는 꼰대가 될 수 있고, 갑질하던 고객은 더 흥분해서 날뛸지도 모른다.
 
평생 그렇게 쩔쩔매고 산 사람은 부하직원도 자기한테 쩔쩔매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가 제3자를 언급할 때 “그 친구 참 괜찮아. 윗사람 모실 줄도 알고, 어려워할 줄도 알고...” 아, 난 지금껏 ‘모시지’ 않고 ‘대했’구나! 그의 말에 따르면 쩔쩔매지 않은 것은 분명 ‘죄’였다.
 
주변의 유능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일 똑부러지게 하면서 당당하게 산다. 낡은 조직문화를 실력으로 돌파하는 것, 그게 우리 모두 마음 속으로 응원하는 바 아닐까. [사진 Pixabay]

주변의 유능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일 똑부러지게 하면서 당당하게 산다. 낡은 조직문화를 실력으로 돌파하는 것, 그게 우리 모두 마음 속으로 응원하는 바 아닐까. [사진 Pixabay]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조직문화는 내용도 모른 채 “아, 예!”하며 굽신거려야 할 때가 많다. 자기주장을 펼치는 걸 싫어하는 상사도 있고, 같은 보고를 해도 죄지은 듯이 쩔쩔매며 해야 선심 쓰듯 응낙하는 상사도 있다. 그게 조직을 위한 태도 맞을까?
 
주변의 유능한 사람들을 통해 판단해보건대, 그렇게 쩔쩔매지 않으려면 평소에 일을 잘하고 좀 당당하게 ‘막 나가야’ 한다. 일은 일대로 확실하게 하면서 윗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지내면 좀 뻣뻣하게 군다 한들 아무도 건들지 못한다(물론 예뻐하지도 않는다). 까딱하면 자기가 다치니까, 아니면 부려먹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니까.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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