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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젠더 간 혐오는 한국 사회의 누적된 문제들이 뿌리

젠더 갈등 줄이기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젠더 갈등은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근본적 변화이다. 또한 단순히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고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 젠더 갈등이라는 형태를 빌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이 현상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이미 겪은 여성의 상대적 진보화라는 보편성이다. 다른 하나는 여성의 진보화가 젠더 간 혐오와 함께 일어나는 한국적 특수성이다.
 

가부장제의 남녀 분업 깨지고
일자리 줄며 살벌한 무한경쟁
젠더 정책만으론 해결 어렵고
남여 공존하는 방향 모색해야

남성과 여성 사이에 정치적 의견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정치적 젠더 갭(political gender gap)이라고 한다. 1960~70년대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가 많았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고, 따라서 주요한 정치적 균열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대체로 80년대를 거치면서 진보·보수 성향에 있어서 성별 차이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해체(dealignment)’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90년대 들어서면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진보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다. ‘재정렬(realignment)’이다. 미국에서 이러한 재정렬의 최대 수혜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96년 대선에서 남성 유권자 표만 계산하면 밥 돌에게 300만 표 뒤졌지만, 여성 유권자 표에서 1100만 표 앞서서 연임에 성공했다.
  
한국 젠더 갈등의 특수성
 
한국은 오랫동안 여성의 진보화가 이루어지는 정치적 젠더 갭의 불모지로 남아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견해는 남성과 별 차이가 없거나 미미한 정도로 보수성향을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여성의 급격한 진보화가 관찰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주간 조사 결과들을 모두 성별 분리해보면 추적할 수 있겠지만, 아직 그런 결과를 내놓은 곳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특히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한 시점이다. 대통령 지지율을 기준으로 보면 20대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보통 15%포인트 내외, 많게는 23%포인트 더 높은 지지를 보냈다. 반면 20대 남성은 50대 남성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보수화했다. 23%포인트 차이라면 지역 간 격차의 최대치인 광주·전라와 대구·경북 간 차이에 맞먹는다. 20대만큼은 아니지만 30대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를 세대별 유권자 수에 대입해 계산해보면 젠더 갭으로 인해 갈리는 표가 100만 표를 훌쩍 넘는다. 서구 국가들이 90년대에 경험했던 ‘재정렬’ 현상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비록 20년의 시간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OECD에 가입할 수준의 국가라면 거의 다 겪었던 일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경우 여성의 상대적 진보화(혹은 남성의 상대적 보수화)가 혐오와 엮여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성의 진보화가 20년 전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처럼 혐오는 현재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의 마리 르펜, 독일·스웨덴·오스트리아 등 유럽을 휩쓰는 극우 혹은 심지어 나치 계열 정당의 도약에 이르기까지 혐오를 정치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현상은 대륙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혐오는 대개 이민·종교·인종 같은 것들과 엮여있고, 그것의 정치적 결과는 극우 정치이거나 혹은 테러리즘이다.
  
상호 의존 줄며 젠더 간 혐오 늘어
 
지난해 11월 ‘이수역 폭행 사건’ 피해자라는 여성이 온라인에 올린 사진. 이 사건은 ‘여성 혐오 사건’으로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포토]

지난해 11월 ‘이수역 폭행 사건’ 피해자라는 여성이 온라인에 올린 사진. 이 사건은 ‘여성 혐오 사건’으로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포토]

우리의 혐오는 젠더와 엮여있고 그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민자나 난민들은 대개 시민권이 없어서 일방적 희생자가 된다. 반면 한국에서 젠더 간 혐오의 대상이 되는 여성 혹은 남성은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민이다. 양쪽이 다 유권자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치는 젠더의 전쟁터가 된다. 대상은 다르지만 서구의 혐오와 우리의 혐오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배경 변수들은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탈산업화와 그로 인한 성장률 하락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일자리가 귀해지면 사람들은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게 되는데, 서구의 경우 그것이 이민자였다.
 
우리의 경우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OECD 하위권의 경제 활동 참여밖에 할 기회가 없고 동시에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여전히 가장 큰 편이어서 분노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젊은 남성들은 그들대로 아직 제대로 사회에 진출하지도 못했는데 여성들이 분노하는 사회구조와 제도에 자신들은 별 책임이 없고 이 살벌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여성에게 조그만 기회라도 더 부여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분노한다.
 
다른 한편으로 탈산업화는 조금 더 복잡한 방식으로 젠더 간 혐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가부장제 사회는 오랫동안 성별 분업에 기초해 작동해왔다. 남성은 일해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가사를 책임지는 식이다. 탈산업화와 같이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성은 집 바깥에서 할 역할을 잃어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집 바깥에서의 분업이 먼저 깨지는 셈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집 안에서의 분업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상호의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에밀 뒤르켕이 『사회분업론』에서 일찌감치 지적했듯이 상호의존성은 근대 이후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작동 원리였다. 서로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서로에 대한 혐오를 삼가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서로 의지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가정을 이루어야 할 필요도 적어지고 출산을 해야 할 이유도 적어진다. 한국에서 기록적인 속도로 비혼율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낮아지는 그간의 경험은 오늘날과 같은 젠더 간 혐오의 전조 증세였다고 볼 수 있다.
  
무능력 정치가 젠더 갈등 부추겨
 
탈산업화가 경제적인 배경 변수라면 정치적인 배경 변수는 혐오의 공급이다. 나쁜 의미의 정치꾼들은 혐오를 일으키는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상대 정파를 공격하는 데에 활용하고 동원한다. 그들은 더 좋은 정책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상대 정파를 혐오할 근거들만 미끼처럼 흘리고 다닌다. 그들에게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폭로나 가짜 뉴스는 유용한 도구이다. 그렇지 않아도 혐오할 대상을 찾던 사람들은 이 미끼를 덥썩 문다.
 
권력구조도 선거제도도 정당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지 못하는 한국 정치는 오랫동안 상대방의 발목잡기만이 유일한 경쟁의 도구였다. 이제는 혐오 공급의 달인이 되었다. 국회를 팽개치고 벌어지는 이성을 잃은 장외 집회나 포털에서 일어나는 실시간 검색 전쟁은 이러한 혐오 공급과 혐오 수용의 현장이다.
 
미투 운동의 열기와 혜화역 시위 같은 예상치 못한 여성들의 연대에 화들짝 놀라 친여성 정책으로 돌아서던 정부와 정치권은 젊은 남성들의 강력한 반발에 또 한 번 놀라 눈치만 보는 형국이다. 지금의 젠더 간 혐오는 젠더 정책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기술과 경제가 달라지고 사회의 구성 원리가 달라지는 시점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함께 하고 어떻게 서로 의존할지 빨리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여성과 남성이 안심하고 친밀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겉으로는 혐오라는 종양으로 드러나지만, 그 밑에는 우리 사회의 누적된 문제들이라는 커다란 뿌리가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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