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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엔 국회서 통일방안 만들었는데, 지금은 왜 못 하나

김진국 기자 사진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주역 이홍구 전 총리 

우리 정부 공식 통일방안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89년 9월 11일 국회에서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일부 보완했다. 그 전에는 통일방안이 없었다. ‘북진통일론’이 냉전 시대를 관통했다.
11일은 이 통일방안이 나온 지 30주년이다. 노태우 정부의 초대 통일원 장관으로, 전무후무한 우리 통일방안을 만든 주역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3일 만났다.

87년 곡절 끝 노태우 대통령 당선 뒤
국회서 통일안 합의해 오라며 맡겨

3김 야당 총재 합리적 리더십 발휘
요즘은 그런 리더십 찾아볼 수 없어

유엔 동시 가입, 비핵화 선언 이끌어
YS-김일성 회담 무산은 아쉬움

정치는 행정 아닌 타협으로 힘 얻어
그래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소생

“역사적 배경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예요. 하나는 88, 89년 무렵 2차 대전 이후 거의 40년 동안 계속된 동서 냉전이 막을 내려요. 한국은 분단 자체가 냉전의 결과였고, 실제로 전쟁까지 했잖아요. 냉전 종식의 대표적인 상징이 88년 서울올림픽입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방세계가, 84년 LA 올림픽은 동쪽에서 보이콧했어요. 반쪽 올림픽이 됐죠. 냉전이 끝나면서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어 서울올림픽에는 전부 모이게 됐어요.”
 
대통령 맘대로 하겠다 하면 정치 죽어
우리 통일방안도 탈냉전의 흐름을 탄 거네요.
“네, 우연히 한국에서 4·19로 시작해서 5·18 민주화를 거치며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최고조에 이른 게 87년 6월 항쟁이에요. 냉전이 끝나는데 맞춰 한국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민주화에 성공한 겁니다. 지난번 촛불 혁명도 헌법대로 하라는 요구였어요. 헌법 주의랄까, 헌법 중심제가 국민 사이에 상당히 뿌리내린 정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대선에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노 대통령 당선이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36%밖에 득표를 못 했어요. 모든 대통령이 자기가 중심이 돼 일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노 대통령은 국회 중심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이 민주공동체 통일방안이 만들어졌다는 보장이 없었죠. 더구나 대통령 선거 넉 달, 취임 2개월 만에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고, 야 3당이 국회를 움직이게 됐어요.”
정치적으로 어려운데도 통일을 주요 과제로 삼았네요.
“87년 6월 항쟁의 요구가 민주화와 통일이었어요. 대학생 임수경이 평양에 가고, 학생들 구호에 항상 ‘민주화 + 평화통일’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13대 국회를 개회하자마자 5공 특위와 통일 특위를 만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북진통일’이라고 했는데, 세계정세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거든요.”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3일 ’정치는 행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얘기하고, 생각해보고, 타협하는 것으로 힘을 얻어 해결하는 것“이라며 ’민주정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3일 ’정치는 행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얘기하고, 생각해보고, 타협하는 것으로 힘을 얻어 해결하는 것“이라며 ’민주정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어떻게 그 일을 맡게 됐습니까.
“나는 민정당이나 노태우 대통령하고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그런데 취임 한 달 전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 요청으로 노 대통령에게 국제 정세와 통일 관련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그때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아이디어를 말했죠.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한 달 뒤 다시 불러 ‘이 교수가 통일원 장관을 맡아 국회와 상의하며 통일방안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해요.”
직접 세 김 총재들과 협의하신 겁니까.
“노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 됐다고 마음대로 할 문제가 아니다. 합의가 제일 중요하니까 국회에 가서 합의해오라. 대충 방향은 정했으니까 당신에게 맡기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하기 쉬웠어요. 그렇게 힘을 실으니 세 분 김 총재도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러 가는데 아무리 바빠도 연락하면 다음 날로 넘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핵심은 뭡니까.
“솔직히 얘기하면 대한민국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체제를 합치는 건 당분간 어려운 얘기야. 되지도 않고 복잡하기만 해. 그걸 피해야겠다. 최하 30년, 50년을 전제로 통일방안을 만든 거지. 당장 통일되는 것처럼 오해하면 곤란해. 그런데 분단 고착화로 가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민족은 하나고, 국가는 둘일 수 있다. 둘이 어느 시점에 가서 다시 하나로 만날 수 있는 거고, 민족이 갈라지면 안 된다. 국가와 민족의 차이는 언어와 문화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다행히 다 같은 말을 쓰면서 같은 풍속과 같은 가치관을 나눠서 살아왔기 때문에 분단 문제는 있지만 어떻게든지 같이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어요. 어떻게 통일로 가느냐. 점진적으로, 시간이 걸리지만, 평화적으로, 절대 전쟁은 다시 안 되겠다는 겁니다.”
멀리 보고, 공존하는 거네요.
“여태까지 어려웠던 건 동서 냉전이 있었어요. 독립운동 시기부터 이쪽은 미국이나 유럽 같은 민주주의 체제가 모델이고, 저쪽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전쟁도 했고, 40년 동안 그런 국가 체제를 운영해왔으니까, 한 번에 두들겨 맞출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민족 공동체, 두 개의 국가체제로 가는데, 어떻게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 그게 기본 아이디어였어요.”
이홍구 전 국무총리(왼쪽)가 1988년 통일원장관 시절 광화문정부청사에서 열린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 앞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운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환담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이무렵부터 1년 동안 3김 총재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협의하고 다듬었다. 신인섭 기자

이홍구 전 국무총리(왼쪽)가 1988년 통일원장관 시절 광화문정부청사에서 열린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 앞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운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환담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이무렵부터 1년 동안 3김 총재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협의하고 다듬었다. 신인섭 기자

야당과는 협의가 잘 됐습니까.
“보수고 진보고 다른 안이 나올 여지가 없었어요. 여소야대인데 세 야당 총재가 아주 합리적인 분들이고, 옛날 걸로 고집하려고 그러지 않았어요.”
이념적으로 어려운 조합인데….
“요새 정치에 대한 국민 실망이 커서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정치가 안 된다’, ‘국회라는 건 맡기면 엉망이 된다’, 이런 게 통념이 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국회가 이런 큰 문제를 충분히 논의해서 완전합의에 이르렀어요. 30년 전에는 했는데 지금은 왜 안 됩니까. 3김 총재가 다 훌륭했습니다. 큰 방향에 대해 맞으면 조그만 문제들은 어떻게든 맞춰 국가의 대방안을 만드는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세 분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대통령입니다. 우리 한국 정치문화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중심제거든요. 그러니까 대통령이 내 맘대로 하겠다고 하면 처음부터 얘기가 안 돼요. 대통령이 야당 총재들 의견을 잘 모아서 해보라고 하니까 정치가 살아나지. 다행히 그때는 양쪽에 다 리더십이 있었어요. 지금은 양쪽이 다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우리가 직접 하겠다’고 나오니까, 점점 정치는 없어지고 문제만 쌓이는 겁니다.”
북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국제 정세가 딱 맞아떨어졌어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방안이 나온 다음 해 독일 통일이 되잖아요. 90년 중반쯤 안기부(현 국정원) 중심으로 왔다 갔다 대화를 해보니 북한도 긍정적으로 나와 90년, 91년 총리회담을 6번이나 했어요. 91년 불과 1년 반 만에 나온 결과가 세 가지에요. 첫째, 남북기본합의서. 두 정부가 이제부터는 상의해가면서 이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6개 분야 공동위원회를 만들었죠. 두 번째 유엔 동시 가입이에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국가를 실현한다고 했어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체제를 국제적으로 인정해주는 주는 거니까 북한으로서는 좋은 얘기지. 세 번째가 비핵화 공동선언입니다. 그때 이미 핵 문제가 나올 때거든요. 핵폭탄에 의해 사람이 많이 죽는 경험을 직접 한 나라는 일본하고 우리밖에 없어요. 수십만의 희생자 가운데 10~15%가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비핵화로 가는 수밖에 없다.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보다도 훨씬 더 디테일이 거기에 다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합의가 흐지부지된 거죠.
“92년 합의서를 발효시키고 나니까 그때부터 파탄이 시작된 겁니다. 93년 초에 북한이 핵이 있다고 해요. 미국 국방부 장관이 경우에 따라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해야겠다고 하고…지금까지 대결 구도로 가 버렸어요. 파탄을 막을 절호의 기회가 94년 8월 김영삼-김일성 회담이었습니다. 김일성이 1년만 더 살아줬으면…. 그 계기를 뚫은 것은 미국입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나러 갔어요. 러시아는 91년 해체되고, 중국은 개방으로 가기로 결정했어요. 내 생각엔 김일성이 우리 통일방안인 ‘일공동체양국’이 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처럼 해보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 김일성은 중국도 잘 알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능력도 있었어요. 그런데 김정일과 후계구도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불안한 거야. 북한체제는 일종의 왕조체제라 수령체제를 안 하고는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공동체 통일방안이 일단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된 겁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3일 ’지금은 여야 양쪽에 다 리더십이 없어 점점 정치는 없어지고 문제만 쌓인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3일 ’지금은 여야 양쪽에 다 리더십이 없어 점점 정치는 없어지고 문제만 쌓인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통일방안 동력은 대화·협상서 나와
살릴 방법은 없나요.
“지금도 그게 대한민국 통일방안으로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생각할 게 대통령책임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의회 중심주의를 살리느냐. 그렇게 나가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최대 경제 교역국이 중국 아닙니까. 북한하고 못할 이유는 스스로 만든 장벽 때문입니다. 우리도 손해 보고, 북한도 손해 보고… 말이 안 되는 얘기지. 김일성도 그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그런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안 하겠다고 고립으로 가서, 모든 것을 핵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말입니까.”
최근 우리 외교는 여야 합의가 아니라 정부 내 합의가 안 된 상태로 중요한 결정을 내지르는데.
“좋게 얘기하면 민주화운동 때 탄압도 심하고 그랬으니까 가까운 사람들끼리 숨어서 결정하던 경험이 하나의 정치문화가 되고, 그것을 청와대까지 가져간 겁니다.”
그는 ‘정치의 행정화’를 경계했다.
“정치의 행정화는 안 됩니다. 대통령제를 바꿀 수 없지만, 대통령이 있다고 국회를 무시하라는 얘기는 아니거든. 정치는 행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얘기하고 생각해보고, 타협하는 것으로 힘을 얻어 해결하는 거거든요. 한국의 민주정치를 활성화해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삽니다. 동력은 많은 대화와 협상에서 옵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그는 경기고·서울법대를 거쳐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이던 그는 노태우 정부 때 국토통일원(현 통일부)장관, 주영국대사를 지냈고, 김영삼 정부에서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통일원 부총리, 국무총리를 역임한 뒤,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대표최고위원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 초기 주미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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