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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추석엔 가족여행 가요, 차례는 설에 지낼게요

명절 신풍속도
‘해외로 떠날까 국내로 갈까? 아니면 교외에서 캠핑하거나 나들이할까.’ 통상 여름휴가를 앞두고 고민하는 즐거운 선택지다. 그런데 명절 연휴를 앞두고도 이런 고민에 빠지는 가족이 늘고 있다. 최근 의식의 변화로 명절 풍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추석으로 불리는 중추절(仲秋節)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수확에 대한 감사와 함께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예를 갖추는 명절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가족 갈등을 유발하는 낡은 관습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가치관의 변화와 가족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추석 풍경에 대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명절을 한 번만 지내거나 안 지내는 분 계신가요? 저희가 큰집인데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작은아버지 두 분이 차례를 지내러 계속 오세요. 근데 어머니를 포함해 우리 가족은 이번부터 추석 차례를 안 지내기로 합의했거든요. 그래서 작은아버지들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네요.’
 
지난달 중순 한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친척들이 한데 모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있는 때여서 게시판 글은 누리꾼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 글의 댓글에는 ‘올해부터 설에만 차례를 지내는 방식으로 바꿨다’ ‘제사를 절에 맡겨서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제사를 서서히 줄여 오다 이번 추석부턴 안 지내기로 했다’ 등 공감하는 의견들이 주를 이뤘다.
 
추석이면 가족이 함께 모여 전과 튀김을 부치고 풍성한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려야 한다는 전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설과 추석 중 하나만 선택해 차례를 지내면 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이에 따라 추석에는 관습에 얽매이는 대신 각 집안의 여건에 맞게 명절을 즐기려는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서울시 은평구의 박찬하(36)씨네 가족은 제사를 모시는 큰집이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추석 차례를 건너뛰고 있다. 박씨는 “가족과 협의해 결정했다. 삼촌·고모에게도 양해를 구해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며 “지난해에도 가족 캠핑이나 리조트 여행으로 추석 연휴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명절 연휴를 직계가족끼리 따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박씨는 여행을 즐기고 교통체증도 피할 겸 경기도 양주에 있는 처가에는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인사를 드리러 간다.
 
추석 때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집안 어른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면 친척 집을 돌며 문안을 드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요즘엔 빠듯한 시간과 경비 부담으로 이런 관례를 생략하고 안부 인사를 전화로 대신하는 추세다.
 
김동훈(41·경기도 고양시)씨도 지난해 추석 차례를 건너뛰고 가족 캠핑을 갔다. 그는 “차례는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지만 반드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어른들께 눈치는 좀 보이지만 추석 풍토 변화에 공감한다”고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설에만 차례상 준비하는 가정 늘어

명절에는 민족대이동으로 심각한 교통체증이 빚어진다. 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로또 같은 기차표 구하기에 열을 올려야 한다. 이처럼 길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상황을 비효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김태오(38·부산시 연제구)씨는 “일곱 살 아이가 힘들어하고 차가 너무 막히기 때문에 명절엔 대구에 있는 처가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엌일을 전담하는 여성의 경우 가족과 손님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음식을 마련하고 치우다 보면 파김치가 된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명절 음식 준비에 매달려 왔던 어머니들은 “우리 대에서 제사 음식 만드는 문화는 끝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상다리가 휠 정도로 거하게 차려지는 차례상은 점차 간소화되는 추세다. 포항 죽도의 큰집 맏며느리 김재순(68)씨는 “힘들었던 명절 문화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며 “형제나 자식이 집으로 오면 아무래도 신경 쓰이고, 가고 나서도 치워야 할 것이 많아 피곤하다”고 하소연했다.
 
이민주(63·부산시 동래구)씨도 되도록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우리 세대는 습관처럼 하면 되지만 며느리들은 그렇지 않다. 안 그래도 멀리서 오기 때문에 웬만하면 혼자 음식 준비를 마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먹을 양만 적당히 만들거나 각자 한 가지 음식을 맡아서 해오는 방식으로 정리된 가족도 많다. 결혼 2년차 이수란(35·서울 노원구)씨는 “큰집에서 음식을 줄이는 추세라 마음은 편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해도 되는지 불편한 마음이 없진 않다”고 심정을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집에서 음식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외식하게 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게 된다. 주영아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가풍보다 핵가족 부부 중심의 가풍의 비중이 더 커지고 있다”며 “그런 흐름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차례 문화를 간소화하거나 대체하는 현상은 사회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추세”라고 분석했다.
 
매년 명절 연휴 때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가족들로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고향을 찾기보다 국내 여행을 택하는 가족도 늘고 있다. 유교 최대 덕목인 효(孝)가 중시된 명절이지만 효의 범위는 직계가족 위주로 좁혀지고 있다. 젊은 부모 세대인 X·Y세대(1970~80년대생)만 하더라도 이제 ‘명절에는 대가족이 모여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인식이 희미해지고 있다. 즉 대가족 중심의 집단 문화보다 직계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명절에 되새기는 가족문화 퇴색 우려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 맏아들 박정준(50·대전시 중구)씨는 “다들 사는 게 바빠서 명절이라는 이유로 가족이 모이게 되는데, 만약 이런 명절 문화조차 없어진다면 가족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사라질 수 있다”고 토로했다. 차례를 지내지 않고 간단한 예배로 대신하는 종교적인 측면도 변화의 원인 중 하나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 추석의 풍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김단호(38·서울 서대문구)씨는 “‘차후 내 자식은 추석이 주는 정서와 추억을 못 느끼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명절에 대한 준비 부담은 줄었지만 마음은 허전하고 심심하다”며 다른 시각을 보였다. 주 교수는 “지금의 핵가족 부부 중심의 가족 체계에선 나의 부모가 곧 조상의 개념이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상이 되고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녀평등 의식이 확산되면서 명절에도 일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며 “예전처럼 전담이나 희생을 강조하기보단 소통을 통한 적절한 안배로 가족만의 새로운 규칙과 가풍을 만든다면 더 건강한 명절 문화가 자리 잡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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