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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강 건너려면 기존 다리 허물기 전 새 다리 놓아야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정부가 지난 23일 한·일 관계를 넘어 한·미·일 관계의 주요 척도가 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종료를 결정했다. 국정을 운영하는 데는 핵심 지향점이 분명해야 한다. 안보의 미국이냐, 경제의 중국이냐 하는 갈등에서부터 한·일 역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사를 결정할 때는 그 지향점에 부합하느냐가 판단 기준이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북핵 해결과 평화·번영에 부정적
한·미 동맹에 커다란 균열 초래
미국, 사태 되돌릴 역량 발휘해야

“핵 없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다. 1989년 북한 핵이 지표에 올라온 이후 국민의 지지를 받아온 정책 방향이다. 물론 정권에 따라 다소 변형도 있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누구보다도 이 지향점을 가장 앞세워왔다. 그래야 나라가 안전하고, 경제가 살며, 외세 의존을 줄이고, 논란이 되는 극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그 지향점을 잊고 헤매는 중이다.
 
일본은 애써 부인하지만, 과거사 논쟁과 경제 제재를 결부시켰다. 기존의 국제 통상 규범에서 거칠게 벗어나는 행동이다.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의 얼굴에 두고두고 얼룩을 남길 것이다. 그런데도 그 대응의 목적으로 지소미아를 종료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고, 또 극일로 가는 길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지소미아 종료는 미국에 더 큰 충격
 
3년 전 한·일이 지소미아를 체결한 데는 미국의 손이 작용했다. 미국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별도의 군사 정보 채널로 운용하는 것보다는 일원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우리 정부에 강조해 왔다. 군사적 측면과 함께 정치적·상징적 효과도 고려했다. 한·미·일을 엮어 세계 전략의 한 핵심축으로 삼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지소미아는 미국 주도로 탄생한 소산물(brainchild)이다.
 
이런 배경을 잘 아는 우리 정부는 협정 종료로 일본보다는 미국의 충격이 더 크리라는 것을 당연히 예견했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지 못한 데는 미국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미국은 마치 이런 책임을 의식하지 않은 듯 한국의 조치에 대해 실망을 표시했다. 조변석개하는 트럼프의 트윗 말 잔치에서 나온 것이라면 차라리 지나가는 언사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용어 선택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는 미국 국무부가 “한국 방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미군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서 ‘우려와 실망’을 공식적으로 표시했다. ‘실망’이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걸린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적대국에 대해서도 흔치 않게 쓰는 말을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를 두고 있는 동맹국에 대놓고 한 것이다. 친밀한 외교관 사이에서 오가기 힘든 말이다. “지금의 관계를 그대로 이어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는 종료하면서 한·미 관계를 업그레이드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는 한겨울에 신발 벗고 등산하자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한마디에 절절매라는 말은 아니다. 트럼프의 상식을 넘는 방위비 분담 요구나 통상 압박 전술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잘 다듬어진 논리와 단단한 기로 무장하여 대응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지금 정부가 최고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북핵 문제 해결과 평화·번영을 실현하는데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이다. 몇 가지 이유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첫째, 워싱턴의 눈에는 한·미·일 안보 협력의 균열이 대북 핵 협상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간다. 북핵 문제에 투입할 에너지를 한·일 관계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미국의 관심이 이란 핵 문제 등으로 크게 분산된 상태에서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가 방어용 억지(deterrence) 수단을 넘어 한국에 대한 강요(compellence) 수단임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이 한반도 권역용 미사일의 고도화 실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신호의 하나다.
  
북한, 핵을 한국 강요 수단으로 삼아
 
북한이 지난 24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한 초대형 방사포의 발사 모습.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24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한 초대형 방사포의 발사 모습. [연합뉴스]

둘째,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미·일 동맹을 기본 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일본은 필요할 때마다 미국의 대북 정책에 제동 역할을 해왔다. 일본이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아야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의 조화로운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한·미 공동의 대북 건설적 관여 조치를 꺼낼 때마다 미국은 “일본은 어떻게 가담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북핵 문제의 오랜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지만, 현실 국제 정치의 한 단면이다.
 
셋째, 한국이 미국까지 테이블의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판에 평양이 서울의 말과 행동에 어떤 무게도 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이미 각종 막말로 한국의 지도자를 몰아세우고 있다. 서울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워싱턴을 움직여 제재 해제를 끌어낸 다음 경제 지원에 앞장서라는 것이 평양의 요구이다. 그런데 워싱턴에 대한 영향력이 없는 서울을 향해 소위 ‘우리 민족끼리’ 정신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다가갈 가능성은 더 희박해질 것이다.
 
국가는 개인과 다르다. 감정 표출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재선 가도에서 무슨 행동도 서슴지 않는 트럼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아베, 중국몽을 앞세워 미국과의 대결을 불사하는 시진핑, 게다가 핵 보유국을 자처하면서 한국을 아래 계단으로 밀어내려는 김정은이 버티고 있다. 그 어디에도 우리의 감정이 작용할 공간은 없다.
  
꽉 막힌 절벽서 틈새 찾는 게 외교
 
그런데도 우리는 일본·중국·미국을 포함한 대외 관계와 남북 관계에 걸쳐 감정 과잉 징후를 보여 왔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위 ‘국민 정서’가 과도하게 투영된 정책은 지속성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분단의 약점을 안고, 강대국들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은 덩샤오핑이 강조한 것처럼 속으로 힘을 길러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다. 한국형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접근이다.
 
우리 정부 안팎에는 ‘한·미·일 vs 북·중·러’의 대립 구도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관념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을 건너려면 기존의 다리를 허물기 전에 새로운 다리를 먼저 놓아야 한다. 중·러가 동아시아에서 미국 견제에 열을 올리고, 북한도 그 틀에서 움직이고 있는 판국에 한·미 동맹의 균열부터 자초할 여유가 없다. 남북과 북·미 사이에 정상회담이 예정될 때마다 사전에 북·중이 정상회담을 가진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소미아는 효력 종료 결정 통보 3개월 후에 종료된다. 미국은 일본의 일탈적 행동으로 벽을 등지고 서게 된 한국의 반응에 대해 실망만 표시할 것이 아니라 사태를 되돌릴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자신이 만든 소산물의 사망을 방치했다는 오명으로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일 양국은 강제 징용 문제의 해법을 서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경제 제재 이행을, 한국은 지소미아 효력 종료를 각각 유보하는 것이 갈 길이다. 두 개의 조치를 굳이 연계시킬 필요는 없다. 각각 별도의 명분으로 가능하다. 꽉 막힌 절벽 앞에서도 보일락말락 한 틈새를 찾아 넘어가는 것이 외교라는 예술이다.
 
“어느 항구로 가는지 모르는 선장에게는 아무리 순풍이 불어도 소용이 없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경구다. 순풍이 아니라 먹구름의 바다를 항해하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눈을 크게 떠야 하는 이유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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