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손주 돌보는 것, 논 지키는 허수아비의 마음으로

기자
윤경재 사진 윤경재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42)

밀짚모자 쓴 허수아비. 모든 걸 바쳐 가을 들녘을 지키는 수호자다.[사진 pixabay]

밀짚모자 쓴 허수아비. 모든 걸 바쳐 가을 들녘을 지키는 수호자다.[사진 pixabay]

 
허수아비 사랑
밀짚모자 핫바지 입고서
아무 말 없이 익어가는 목덜미엔
한여름 매미도 다가서지 않네
 
없는 듯 있다는
그대 사랑을 그리려
 
간밤에 불었던 하늬바람에
벼 이삭 차질기를
팔 벌려 빌어 보았지
 
아직은 한 뼘 남짓
땡볕의 아찔함이 부족하지만
얼기설기 비탈로 선 허수아비
사랑의 그림자가 나직이 길어질 즈음
참새 떼 기웃기웃 낯을 익히고
미소 띤 가을 허공이
말간 도화지 펼쳐놓는다
 
해설
인간의 사랑 vs 허수아비 사랑
요즘 참새 시리즈에는 허수아비와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이 나온다. [사진 pexels]

요즘 참새 시리즈에는 허수아비와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이 나온다. [사진 pexels]

 
요즘 새로 나온 참새 시리즈 하나. 참새 여러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을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옷깃이 펄럭이자 허수아비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거였다. 그러자 그 중 한 마리가 “저게 사람인지 허수아비인지 확실히 구별할 줄 아는 놈, 누구?”하고 물었다. 각자 한 마디씩 거들었으나 뭔가 부족했다. 박수를 가장 많이 받은 대답은 이랬다. “움직이지 않는 건 둘 다 비슷하지만, 스마트폰 보느냐고 머리 숙이고 두 손을 모은 건 사람이고, 바람이 불어서 밀짚모자가 날려도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놈은 허수아비지. 안 그래? 하하.”
 
올해 초에 처조카 딸 내외가 낳은 첫 아기가 벌써 7개월째 접어든다. 여름이 되어 함께 휴가여행을 떠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첫 종손녀인지라 평소에도 아주 예뻐해 주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내가 눈을 맞추면 금세 웃어주었는데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영 딴판이다. 내게 낯을 가리기 시작한다. 자기 엄마 아빠를 확실히 구분하더니만 친소에 차별이 생겨난 듯하다. 아랫니가 두 개 솟아나더니 그만큼 꾀가 늘어났나보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까꿍 하고 어르니 잠시 눈길을 피하고 삐죽빼죽 거린다. 곧 울음을 터뜨릴 눈치이다. 그러자 옆에서 거들던 집사람이 놀라 나를 나무라듯 눈을 흘긴다. 그러곤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외면하고 종손녀만 어르고 달랜다. 이런 말 저런 말을 건네며 마치 애기가 다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한다. 육아 경력이 나보다 월등하니 금세 아이를 방긋 웃게 만든다.
 
낯을 가리는 아기들은 이방인의 눈길에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사진 pixabay]

낯을 가리는 아기들은 이방인의 눈길에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사진 pixabay]

 
그러고는 내게 주의사항을 준다. 아기는 자기 엄마와 아빠가 아니고는 금세 낯설어 하니 보자마자 곧장 들이대지 말고 에둘러서 접근하라고 말한다. 아이가 스스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거리를 유지하되 너무 떨어지지도 말고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도 말아야 한단다.
 
남자는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도 너무 직진만 한다고 나무란다. 여자와 아이는 당사자가 원하는 거리와 간격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한다. 상대방이 다가올 때까지 여유를 갖고 기다려보란다.
 
종손녀가 자라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조카딸이 자주 보내왔다. 그래서 늘 함께 지내는 기분이었다. 볼 때마다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기 모습이 매번 달라지듯이 아기가 우리를 낯설게 느끼는 게 당연한 거였다.
 
나는 우리 애들 키울 때도 적당한 간격을 지키지 못한다고 흰소리를 자주 들었다. 아들이 아빠가 필요할 때는 자기 일 하고 돈 번다는 핑계로 자주 놀아주지 못했으며, 다 자라 혼자 시간을 보내려 할 때 같이 놀자 했다는 거다.
 
이제 조만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터인데 논을 지키는 허수아비 같은 마음으로 손자 손녀를 돌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허수아비는 환경이 변하고 누가 뭐래도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느냐는 말이다.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 손자를 돌보다가도 엄마와 아빠가 오면 돌아서고, 게다가 친구를 사귀면 더 섭섭하게 구는 아이들의 천성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와 지금의 육아 방법은 많이 달라졌다. [사진 pixabay]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와 지금의 육아 방법은 많이 달라졌다. [사진 pixabay]

 
그리고 우리가 아이 키울 때와 지금 육아 방법이 많이 달라져 아들·며느리와도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지금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 산다고 동시대를 산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며, 큰일 난다고 주의를 준다. 자신이 편하다고 상대방 의사를 묻지 않고 습관에 젖어 처신하다가는 사달이 벌어진다는 거다. 내가 살아봤는데 이런 게 더 옳은 거 같다는 말은 실상 동시대를 살자고 강요하는 난센스라는 거다.
 
요즘엔 논에서 허수아비를 만나 구경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밀짚모자와 핫바지를 입고 논 가운데 선 그 모습에는 많은 걸 떠올리게 한다. 벼가 다 익어 차질게 되려면 가을의 마지막 뙤약볕이 필요하지만, 또 건조한 서풍인 하늬바람이 불어 고온 다습한 여름의 기운을 몰아내야 한다. 그런 게 자연의 순리이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모든 걸 바쳐 농군을 돕는 허수아비 사랑은 지금 우리 나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이겠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