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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값 사흘새 40% 올랐다"…아르헨 좌우 모두 포퓰리즘 앞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대형 식료품점의 모습. [EPA=연합뉴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대형 식료품점의 모습. [EPA=연합뉴스]

 
"그저께 약국에 가서 다음 달 필요한 약을 미리 샀어요. 한 달 사이 물가가 얼마나 폭등할지 모르니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계획적으로 사놓아야 해요."

페소화 가치 급락, 수입품 중심 급등
다시 고개드는 '포퓰리즘' 그림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75세의 은퇴한 의사 실비아 에체베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온 에체베리아는 최근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이 치솟으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고, 자주 가던 영화관에도 발길을 끊었다. 알자지라 뉴스는 2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이같은 상황을 전하며, 폭발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으로 지난 2001년 아르헨티나를 덮쳤던 대불황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상승 추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르헨티나 발전을 위한 경영자협회 레오 빌란스키 회장은 "지난주 금요일에 큰 밀가루 봉지가 900페소(약 2만원)였는데, 사흘만에 1250~1350페소로 올랐다"며 "주말 사이 물가가 40%나 상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정육점 사장은 알자지라에 "2018년 5월과 비교했을 때 1년 사이 소고기 가격이 67% 올랐다"며 "앞으로도 7~10% 더 오를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바나나, 아보카도 등 수입 식료품 가격이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페소화 평가절하로 인해 달러로 대금을 지급하는 수입품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도 밀가루, 기름, 면, 쌀 등 필수 식품의 가격이 크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 6월 4인 가족 기준 장바구니 물가가 지난해 동기 대비 58%나 올랐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 추이 [블룸버그통신]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 추이 [블룸버그통신]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식료품점을 찾는 손님이 크게 주는 등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늘면서 경기 전체가 얼어붙는 모양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에만 식료품점과 쇼핑몰 매출이 각각 13.5%, 1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경기 부진은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지며 가난의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경기 악화로 인해 서민 살림이 퍽퍽해지면서 아르헨티나의 고질병인 '페론주의'(좌파 포퓰리즘)가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12일 열린 차기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인기 영합주의적 정책을 들고 나온 좌파 진영의 야당 후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친(親)시장 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그 여파로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의 혼란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페소화 가치는 일주일 새 약 22% 하락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증시를 대표하는 메르발(MERVAL) 지수도 같은 기간 약 31% 떨어졌다. 국가 부도 위기를 의미하는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아르헨티나 국채 5년물 기준)은 전장 대비 98% 폭등해 2016bp(1bp=0.01%포인트)를 기록했다. 국제 신용 평가 회사인 피치는 아르헨티나의 신용등급을 'B'에서 'CCC'로 두 단계 하향 조정했다. CCC는 지난 2012년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가 기정사실화 됐을 때 매겨졌던 등급으로, 투기(정크) 등급이다. 
 
재집권 전략에 빨간 불이 켜진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도 10월 대선 본선을 겨냥해, 자유시장주의 정책에서 포퓰리즘 정책으로 노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14일 마크리 대통령이 발표한 서민 지원 대책에는 근로자 소득세 인하, 최저임금 인상, 90일간의 유가 통제, 복지 보조금 확대 등을 위해 7억4000만달러(약 9000억원)를 정부가 추가로 지출하는 내용이 담겼다. 
당초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70억 달러(약 69조1866억원)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긴축재정과 세금 인상 정책을 유지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당장 재선이 급한 마크리 대통령이 포퓰리즘 민심에 편승하기 위해 이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기업인 출신인 마크리 대통령은 4년 전 대선에서 '경제 대통령'을 내세워 당선됐다. 12년 동안 이어진 좌파 정권에 염증을 느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우파 대통령에 경제 살리기를 맡겼지만 집권 이후 3년간 인플레이션이 55%를 넘었고 페소화 가치는 급락했다. 부진한 경제 성적표로 재선에 먹구름이 끼자 중도우파 성향의 마크리 대통령마저도 인기 영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반발한 니콜라스 두호브네 재무장관이 사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대선에 출마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후보(오른쪽)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 후보 [국영 뉴스통신 아젠시아 브라질=연합뉴스]

아르헨티나 대선에 출마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후보(오른쪽)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 후보 [국영 뉴스통신 아젠시아 브라질=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자본 유출과 외채 상환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IMF 구제금융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2001년의 극심한 불황을 다시 겪게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10월 대선 본선에서 좌파 진영의 페르난데스 후보가 승리해 좌파 포퓰리즘이 부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분석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아르헨티나가 향후 5년 내 디폴트(채무 상환 불이행)에 빠질 가능성이 당초 49%에서 75%로 커졌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산하 기관들의 올해 만기 부채(달러·유로화 표시) 상환액은 현재 159억 달러(약 19조2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파 성향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11일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도적들'이 권력에 복귀하기 시작했다"면서 "아르헨티나가 베네수엘라의 길을 따르기 시작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경영자협회 레오 빌란스키 회장도 "정부의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물가를 잡아둘 수 있겠지만, 계속해서 오르는 물가 상승 추세를 꺾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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