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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놈, 징한 놈, 똑똑한 놈

안충기의 삽질일기

토마토 전성기가 끝나간다. 아래쪽 통통한 녹색 열매 두 개는 할라피뇨다. 양평에 사는 친구가 텃밭에서 키워 먹어보라고 줬다. 엄청 맵다기에 기대했는데 애걔, 고추는 그저 청양.

토마토 전성기가 끝나간다. 아래쪽 통통한 녹색 열매 두 개는 할라피뇨다. 양평에 사는 친구가 텃밭에서 키워 먹어보라고 줬다. 엄청 맵다기에 기대했는데 애걔, 고추는 그저 청양.

탁 … 탁 … 딸깍 … 딸깍 …  
 
이보셔 삽자루 아재, 주먹 쥘 때 소리가 나네?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고 아프지? 그거 방아쇠수지증후군이야. 스마트폰 끼고 사는 자들에게 많은 증상이지. 온종일 손바닥 자판을 쪼아대다 보면 엄지가 뻣뻣해지고 덜걱거리는 바로 그 느낌. 그 병 왜 걸렸는지 알아? 지난 주말, 나를 잡겠다고 미친듯이 낫을 휘둘렀잖아. 열 손가락으로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패대기치고 내 오장육부가 궁금하다며 수술대에 올려놓고 난도질했지? 그렇게 날 쥐 잡듯 하더니 아주 쌤통이야. 아재도 참 집요하대. 어떻게 내 급소를 알고 곳곳에 칼집을 내더구먼. 못 이기는 척 하고 백기를 들었지. 사실 옆구리에 호미 날이 푹 들어올 때 난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 항복한 척 연기했을 뿐이야.
 
요놈이 바랭이다. 서울 효창공원역 앞 인도에 뿌리를 내렸다.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나와 줄기를 뻗고 있다. ’바랭이는 뽑을 때 우두두둑 연쇄음이 난다“ 가평서 농사를 짓는 친구의 말이다. 딱 맞는 표현이다. 바랭이를 뽑다보면 묘한 쾌감이 든다. 누구 명줄 끊는 일이 신날 수도 있다니. 바랭이는 스트레스 덩어리지만 뽑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으니, 이거 뭐지?

요놈이 바랭이다. 서울 효창공원역 앞 인도에 뿌리를 내렸다.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나와 줄기를 뻗고 있다. ’바랭이는 뽑을 때 우두두둑 연쇄음이 난다“ 가평서 농사를 짓는 친구의 말이다. 딱 맞는 표현이다. 바랭이를 뽑다보면 묘한 쾌감이 든다. 누구 명줄 끊는 일이 신날 수도 있다니. 바랭이는 스트레스 덩어리지만 뽑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으니, 이거 뭐지?

내가 명색이 바랭이야. 아재 같은 어리숙한 호구한테 당하면 풀들의 제왕, 절대 지존이 아니지. 철없이 내 앞에서 까부는 애들이 있기는 해. 온몸에 가시로 문신을 새기고 삥 뜯으러 다니는 환삼덩굴 말이야. 걔는 알고 보면 허당이야. 발목을 끊어 놓으면 힘 한번 못 쓰고 주저앉아 말라죽거든. 시끄럽게 설치는 애들치고 센 놈 없어.
 
내가 무림을 제패한 비급 몇 가지 알려줄게. 공개해도 나를 이길 놈이 없으니 상관없어.
   
뽑아서 뒤집어 놨는데 일주일 뒤에 가보니 다시 옆구리에서 뿌리가 슬금슬금.

뽑아서 뒤집어 놨는데 일주일 뒤에 가보니 다시 옆구리에서 뿌리가 슬금슬금.

1 지네발 나는 굽힐 땐 확실하게 굽혀. 어려서 힘이 약할 때는 조용히 바닥을 기며 줄기를 뻗어가지. 뻗는 마디마다 새 뿌리를 내리며 슬금슬금 크다보면 금세 큼직한 방석만 해져. 뽑아서 뒤집어 놔도 소용없어. 며칠 누워 있으면 기력이 돌아오거든. 나를 호미로 박박 긁어내봐야 힘만 빠져. 마디 하나만 남아도 옆으로 가지를 뻗으니 말이야. 기어가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하늘 향해 벌떡 일어서지. 내 특기가 친구들 하고 팔다리를 엮어 스크럼 짜는 거, 알고 있지? 나 같은 밑바닥 인생 앞에서 힘자랑한 아재야, 허리 나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아셔.
 
2 기대기 세고취화란 말 있잖아, 내 돌이 약할 때는 상대 돌에 엉겨 붙어 살아남으라는 바둑 격언이지. 농작물 옆에 짝 달라붙어 살면 이득이 많아. 주인이 때마다 거름 주지, 목마를 때는 물까지 떠먹여주니 이런 천국이 어디 있겠어. 어릴 때 기장·수수·파 같은 애들 옆에 서있으면 사람들이 깜빡 속아. 내 정체를 밝힐 즈음이면 이미 늦어. 내 다리가 걔네 다리와 얽히고설켜있는데 어쩌겠어. 살면 같이 살고 아니면 같이 죽는 거지.
 
바랭이 왕국에는 한치의 틈도 없다. 얘들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독사가 똬리 틀고 기다리고 있을까봐 후덜덜.

바랭이 왕국에는 한치의 틈도 없다. 얘들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독사가 똬리 틀고 기다리고 있을까봐 후덜덜.

3 머릿수 우리 형제들 뽑아내고 훤해진 밭 보면 뿌듯해? 좋아할 거 없어. 흙 속에서 그보다 몇 천 배 많은 씨가 틈만 보고 있거든. 뻥 좀 쳐서 우리 형제들 몇몇만 타작하면 씨앗이 한 대접은 될 걸. 내 사돈의 팔촌쯤 되는 벼는 사람들한테 알랑방귀 뀌며 살잖아. 혼자 힘으로 서지 못하니 모자라는 놈이지. 생각 같아서는 족보 파가라고 하고 싶어. 되는 대로 막 사는 나는 그런 애교 몰라.
 
풀 더미 위로 잠자리 한 마리. 다음 주에 무·배추 모종 심으면 가을방학이다.

풀 더미 위로 잠자리 한 마리. 다음 주에 무·배추 모종 심으면 가을방학이다.

4 만만디 내가 동작이 좀 굼떠. 뜨거워져야 몸을 움직이거든. 다 이유가 있어. 봄부터 장마 전까지는 온갖 채소들이 밭에서 자라잖아. 사람들도 아침저녁으로 풀을 뽑고. 이럴 때 나돌아 다니다가는 제명에 못 죽어. 흙 속에서 살짝 뿌리만 내리고 숨죽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게 상책이지. 장마가 신호탄이야. 비는 연일 추적추적 내리지, 후텁지근하지, 모기는 떼로 설치지, 밭에는 거둘 채소도 없지… 밭주인들 경계가 느슨해지는 시기인 이때 빛의 속도로 땅을 점령하는 거야. 비 그친 뒤 밭고랑에 들어서는 사람들 표정 봤어? 나를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이 나가. 고개를 흔들며 그냥 돌아서는 이들도 많아. 내 취미가 햇볕 자글자글 끓고 땅이 짝짝 갈라지는 8월에 알몸으로 일광욕하기야. 다른 집 애들은 이때 맥도 못 추고 타 죽어. 쇠비름이 좀 버티는데 몸매가 빵빵한 덕이지. 그래도 날씬한 나한테는 안 돼.
 
5 하나 더 우리 집안에 인물이 꽤 많은데 끝판왕은 왕바랭이야. 얘가 천둥벌거숭이지. 밟을수록 독이 오르고 그늘을 죽기보다 싫어해. 밭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를 좋아하고, 차들이 오가는 흙길에서 깔리고 밟혀도 끝까지 살아남아. 우근초(牛筋草)라고도 하는데 쇠심줄처럼 질기고 억세다는 뜻이야. 얘가 살 수 없는 땅은 어떤 풀도 살지 못한다고 보면 돼.
 
장마를 이기고 싹이 튼 가을 상추. 빈틈에 씨를 더 넣었다.

장마를 이기고 싹이 튼 가을 상추. 빈틈에 씨를 더 넣었다.

6 마지막 하나 내 출생의 비밀도 밝혀줄게. 지구 식물 85%는 광합성을 하며 탄소(C)3개짜리 화합물을 만드는 C3식물이야. 5%가 나처럼 C4식물인데 탄소 4개짜리 화합물을 만들지. 내 조상은 이미 오래전에 가뭄과 고온 아래서 물과 질소를 낭비 없이 쓰는 방법을 깨우쳤어. 그래서 C4 대부분이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살아. 8월 땡볕은 내게 보약인 셈이지. 사탕수수·옥수수·강아지풀·파피루스 같은 애들이 내 친구야.  
  
삽질일기

삽질일기

듣고 나니 서늘하지? 석 달 전에 밭 쥔장이 밭둑에 약을 쳤는데 독하긴 독하대. 그래도 견딜만하던 걸. 혹시 내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소문나면 멸종당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달여 마시면 눈 맑아지고, 귀 밝아지며, 소화 잘 된다는 말이 있기는 해. 그렇다고 누가 뜯어다 잡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날 뜨거우니 아이고 좋아라.    
 
그런데 나도 얘는 겁나: 가을바람.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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