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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영화와 달리 내뺀 김상헌···文에겐 최명길이 필요하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인물은 최명길과 김상헌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청(淸)나라의 요청을 수용하고 화친을 맺자고 했던 최명길에 대해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명길의 목을 베소서”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목을 매고 자결하며, 발언에 대해 책임지는 한편 후세에 자신의 절개를 확인시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에 불과합니다. 두 사람이 주화 대(對) 척화로 맞선 것은 사실이지만 김상헌은 인조가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에게 9차례 절하는 동안 자결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조나 최명길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병자호란의 비극적 결말 이후, 최명길과 김상헌은 실제로 어떤 생애를 보냈을까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 척화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병자호란 정국에서 두 사람의 행보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한쪽은 ‘히어로, 다른 한쪽은 ‘빌런’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당시 여건에선 김상헌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대에 척화론과 대명(對明)의리론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관념 체계였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선제적ㆍ공개적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상당한 비난과 부담을 감내해야 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당대 조선의 정치 무대에서 척화론은 헛된 명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파워를 가진 담론이었다.”(허태구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그렇다고 당시 정권이 명나라의 도움을 기대했다거나 전세를 오판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은 평안북도 가도(椵島)라는 섬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문룡의 군사력이 청나라를 당해내기 어렵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임진왜란처럼 명나라가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그런데도 화친하자는 주화파보다 항전하자는 척화파의 목소리가 더 높았던 것은 역시 당대 조선사회에서 척화의 선명성이 정치인을 평가하는 보편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실리외교 노선을 걸었다는 광해군 시기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광해군의 최측근인 이이첨조차 후금(淸)의 사신을 목 베자는 등 척화 노선을 외쳤습니다. 선왕의 부인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왕의 이복동생 영창대군 살해까지 찬성했던 그조차도 청나라와 화친을 하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청나라에 대한 배척은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실제로 이를 실행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였던 만큼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에 처했어도 “명길의 목을 베소서”라는 척화의 목소리가 울려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반정 1등공신 최명길의 숙명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일관되게 주화론을 견지했던 최명길은 인조반정 후 포상 과정에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입니다. 정권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죠. 
 
그는 일찍부터 후금(청) 문제에 대해 고민했는데, 인조반정 직후 평안감사 박엽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던 데서도 그런 면모가 드러납니다. 박엽이 광해군의 측근이었지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고 국경 사정을 잘 아는 만큼 후금(청)에 대한 방비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명운동은 정치 논리에 밀려 실패합니다. 
 
그는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직을 보전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전쟁은 피하자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습니다. 청나라 사신을 자극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항전이 결정됐을 때도 “일단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보자”고 했다가 빗발치는 상소에 한 때 파직당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가 6일 만에 개성을 통과하며 초고속으로 진군하며 조정이 패닉에 빠졌을 때도 나선 것은 최명길이었습니다. 
그는 “신이 오랑캐 진영으로 달려가 맹약을 어기고 침략한 것을 따지겠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말발굽 아래 죽을 것이오, 다행히 말 상대가 된다면 잠시나마 그들을 묶어둘 수 있을 테니 전하는 그 틈을 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십시오”라고 제안했습니다. 최명길의 목숨을 건 시도 덕분에 시간을 확보한 인조 일행은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이 후세의 비난을 두려워하며 기피했던 외교문서 작성도 떠맡았습니다. 1636년 1월 최명길이 작성하고 인조의 검토까지 마친 문서를 김상헌이 통곡하며 찢어버리자 최명길이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주워야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죠.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최명길은 전후 처리를 도맡았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공할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했을 땐 두 차례 청나라로 가서 이를 거절하는 입장을 설명했고, 명과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발각돼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자진해서 청나라로 갔습니다. “나 같은 대신 한 두 사람이 이 일로 죽어야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다”며 장례 도구를 챙겨가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겪었던 조선 중기 문신 장유는 저서 『계곡집(谿谷集)』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척화를 주장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화의가 성립되는 것을 실로 바라고 있었는데, 다만 실속 없이 떠들어대는 주장에 희생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분명하게 발언을 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유독 최명길이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문득 앞장서서 그 말을 꺼내면서 주저하거나 피하는 것이 없었는데, 끝내는 이 일 때문에 그만 탄핵을 받고 물러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사대부들에게 최명길은 이적이나 다름없엇습니다. 
전쟁에 잡혀간 부녀자들이 돌아와 ‘환향녀(還鄕女)’라며 손가락질당하고 이혼 소송이 속출했을 때 이를 반대한 것도 사대부들에게 ‘찍히는’ 한 요인이 됐습니다. 
 
“만약 이혼을 허락하면 부녀자를 반드시 데려오려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최명길) 
 
여론과 벗어난 최명길의 발언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남겼습니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었으면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다.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역사의 승자가 된 척화론자 김상헌의 행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인조반정의 공신이 아니었던 김상헌은 최명길보다는 상대적으로 책임도 덜하고, 자유로운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조정에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림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비변사 당상 시절엔 국왕이 ‘정차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고 묻자 “하늘의 도(天道)를 믿으십시오”라고 했고, 남한산성에선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면서 왕에게 결사항전을 설득했습니다.
병자호란 후에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원병을 요구하자 “명분과 의리를 저버리면 재앙이 있으니 옳은 의리를 지키고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철저한 대명의리론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이 끝날 무렵 그가 보인 행보는 논란이 됐습니다. 포위가 풀리고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을 때, 그는 동문으로 조용히 남한산성을 빠져나가 고향인 안동에서 칩거했습니다. 그의 처신을 놓고 전후 처리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1640년 척화 행적 때문에 청나라에 끌려가 취조를 당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왕이 항복을 할 때 함께 하지 않은데 대해서도 “늙고 병들어 걸음을 걸을 수 없어서 따라가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보인 당당한 태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앞서 남한산성에서 항복이 결정됐을 때는 목을 매 자결을 시도하긴 했지만,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쇼’라는 비난도 샀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전쟁 초기 척화파의 강경론을 따랐다가 유례없는 굴욕을 당한 인조는 김상헌에 대해 훗날 이렇게 평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시비가 밝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다.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들의 앞장을 섰으니,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김상헌의 일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되는데 무식한 무리는 오히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 하겠다.” (『인조실록』 15년 9월 6일)

 
하지만 후세 조선 사대부들은 주화론자였던 최명길을 ‘배신자’로 규정했고 김상헌은 의리의 수호자로 떠받들었습니다. 특히 노론의 종주였던 송시열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최명길에 대해선 간신(奸臣)이라면서 독한 비난을 한 반면 김상헌에 대해선 ‘모범’으로 극찬했습니다. 이 때문에 최명길은 반정의 공신이었지만 “선류(善類)를 해치고 국법을 어지럽혀 사론(士論)에 죄를 얻은 지 오래”라며 인조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지 못하는 등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이런 세계관과 인물론은 이후 200여년 간 조선의 명분론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많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최명길도 성리학적 세계에서 ‘빌런’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을까요. 인조가 김상헌을 책망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김상헌이 어떤 마음을 쓰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는 김상헌을 사모하여 본받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문재인 정부, 이제는 최명길이 필요하다

지난 7월 1일, 일본의 전격적인 수출 규제 방침 이후 한ㆍ일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양국 정부가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초반에 강경론으로 출발한 정부가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내놓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안보ㆍ경제협력을 지속해 왔다”며 “공정하게 교역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당장 호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정부의 대응전략도 어떻게 변할지 아직은 유동적입니다.
사실 대일 관계는 정부 입장에선 조선 시대 청나라를 둘러싼 주화ㆍ척화 논쟁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 국력을 당시와 단순비교할 순 없습니다. 
다만 여론을 고려하면 강경론을 유지하는 것이 이득이고, 섣불리 유화책을 썼다가는 당시 주화파 못지않은 역사적 오명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그런 상황 조건에 예속됐다간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정치인’ 보다, 국익을 생각하는 ‘정치가’를 기대해봅니다. 정부·여당에 이제는 최명길이 더더욱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오수창 『최명길과 김상헌』, 허태구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정두영 『최명길, 인조반정()의 주역이 주화를 역설한 까닭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대한 발췌 내용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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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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