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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살아남은 백구, 살아난 달팽이

한 뼘은 높아진 하늘. 한 계절이 물러가고 또 한 계절이 밀려온다.

한 뼘은 높아진 하늘. 한 계절이 물러가고 또 한 계절이 밀려온다.

1.
초봄, 밭에는 멍멍이 두 마리가 있었다. 
쥔장네 멍이다. 큰멍은 누리끼리한 바탕에 검은 털이 곳곳에 박힌 황구, 작은멍은 잡색이 섞이지 않은 백구다. 큰멍은 지난해 여름에 강아지였다. 빳빳하게 선 귀처럼 성깔도 한가락했다. 멀리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미친 듯이 짖어댔다. 밥 주러 오는 제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자기 밥그릇 앞에서 얼쩡대는 참새들을 보면 정신 나간 듯이 날뛰었다. 그러니 호구 티 팍팍 나는 내가 나타나면 아주 망나니처럼 나댔다. 묶어놓았기에 망정이지 사고 치기 딱 좋은 종자였다. 작은멍은 그 옆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달달달 떨었다. 세상 구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이였다. 체급이나 털빛으로 보아 둘은 혈연관계가 아니었다.  
나만 보면 반갑다고 꼬리치는 백구. 두발로 서는 신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 때 모습인데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됐다. 초상권을 보호해 주려고 얼굴을 가렸다. 개집 뒤에는 닭장이 있다. 몇 마리인지 세는데 놈들이 자리를 바꾸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헷갈려서 결국 포기했다.

나만 보면 반갑다고 꼬리치는 백구. 두발로 서는 신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 때 모습인데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됐다. 초상권을 보호해 주려고 얼굴을 가렸다. 개집 뒤에는 닭장이 있다. 몇 마리인지 세는데 놈들이 자리를 바꾸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헷갈려서 결국 포기했다.

 
하루는 큰멍과 사귀어 보려고 용기를 내어 가까이 갔다. 단단히 묶은 밧줄을 확인하고 슬슬 접근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날뛰던 놈이 어느 순간 깨갱 하더니 제집으로 냅다 도망치는 게 아닌가. 꼬리까지 사타구니에 말아 넣고서. 아이고 이 자식, 엄청 겁쟁이인데 위장하려고 뻥치고 살았구나. 그리고 나서도 큰멍은 시도 때도 없이 악을 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놈을 우습게 봤다.  
오이 넝쿨이 말라간다. 여름이 가고 있다는 징표다. 일하다가 물 떨어지면 하나씩 따서 씹는다.

오이 넝쿨이 말라간다. 여름이 가고 있다는 징표다. 일하다가 물 떨어지면 하나씩 따서 씹는다.

작은멍은 애교가 넘쳤다. 풀어놓고 키우던 아기 때, 눈만 마주치면 앞발을 들고 꼬리를 흔들며 놀아달라고 헥헥 댔다. 샘가에 앉아 쉴 때면 내 주위를 뱅뱅 돌며 손이고 발이고 마구 핥아댔다. 쓰다듬어주면 더 신나서 내 엉덩이에 코를 들이박고 비벼댔다. 봄이 지나갈 무렵 우렁차던 큰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닭장에서 암탉 날갯죽지를 움켜쥐고 나오는 쥔장에게 놈의 안위를 물어봤다.  
“좋은 데 갔어요.”
그리고 여름이 왔다. 홀로 남은 작은멍 백구는 털갈이를 하더니 금세 몸집이 커졌다. 이놈도 좋은 데 가려나, 언제 가려나 했는데 아직 멀쩡하다. 말복이 지난 11일이었다.
 
오늘의 공부: 뻥치지 말자, 언젠가는 들킨다.


옆 밭에 감자 몇 개가 굴러다닌다. 캐낼 때 빠뜨렸나보다. 뙤약볕을 받아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옆 밭에 감자 몇 개가 굴러다닌다. 캐낼 때 빠뜨렸나보다. 뙤약볕을 받아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고추는 작년만 못하다. 한창 열매를 맺을 때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절반은 죽었다. 오 이장이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반반씩 심었는데 둘 다 맵다.

고추는 작년만 못하다. 한창 열매를 맺을 때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절반은 죽었다. 오 이장이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반반씩 심었는데 둘 다 맵다.

2.
주방에서 상추를 씻던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뭔 호들갑이여, 무농약 삽질 이십년인데 아직도 면역이 안 됐나 벼. 상황이 뻔히 짚이기에 느긋하게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엄지손톱만 한 달팽이 두 마리가 개수대 벽을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내 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주방만이 아니다. 어느 날은 풍란 잎에 좁쌀만 한 달팽이 새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식탁 위에서 자벌레가 꾸불거리고, 가끔은 무당벌레가 거실을 날고, 천장 구석과 자동차 에어컨 송풍구에는 툭하면 거미가 그물을 친다. 베란다에 줄지어 다니는 개미는 새로울 것도 없다.  
놈들의 원산지는 모두 밭이다. 채소를 거둘 때 겉잎을 떼어내고 탈탈 털어내도 어느 틈엔가 묻어온다. 벌레는 내 집에서 일상이 됐고 식구들의 경악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비명의 데시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토마토 옆에서 자라는 차조기. 3년 전에는 밭둑을 몽땅 덮었는데 슬금슬금 줄어들고 있다. 들깻잎이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사람 많겠다. 쌉쌀하니 쌈거리로 훌륭하다.

토마토 옆에서 자라는 차조기. 3년 전에는 밭둑을 몽땅 덮었는데 슬금슬금 줄어들고 있다. 들깻잎이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사람 많겠다. 쌉쌀하니 쌈거리로 훌륭하다.

아내가 소리칠 때 사실 나는 더 놀랐다. 채소에 묻어 들어간 달팽이의 생환 때문이었다. 냉장고에서 한 달이라니, 문득 그 속에서 이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한번 실험해볼까 하다가 생명을 숭상하는 분들이 들고일어나면 당할 재간이 없겠기에 대상을 채소로 바꿨다.  
씨 뿌린 채소가 한창 자라던 5월 18일에 거둬온 채소 일부를 둘로 나눠 냉장고 야채 칸에 넣었다. 하나는 검은 비닐봉지에, 다른 하나는 신문지로 둘렀다. 45일 뒤 꺼내보니 신문지 속 채소의 겉잎만 조금 시들었을 뿐이다. 보름 동안 출장을 다녀와 다시 열어보니 비닐봉지 채소는 바깥쪽이 물렀고, 신문지 채소는 부피가 절반으로 쪼그라들고 곳곳에 검은 반점이 생겼다. 여기까지가 보관의 한계로 보였다. 수시로 뒤적거리지 않고 놔두면 두 달 정도는 싱싱한 상태로 견디지 싶었다. 더부살이하는 달팽이도 그때까진 끄떡없으려나. 비닐봉지 채소 중 성한 상추 몇 포기는 7월 29일까지 73일을 버텼다.  
45일 묵은 채소. 성능 좋은 최신형 냉장고라면 더 탱탱한 모습이겠지.

45일 묵은 채소. 성능 좋은 최신형 냉장고라면 더 탱탱한 모습이겠지.

냉장고에서 73일을 버틴 상추. 살이 쫙 빠져 먹기에는 좀 그렇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실험을 끝냈다.

냉장고에서 73일을 버틴 상추. 살이 쫙 빠져 먹기에는 좀 그렇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실험을 끝냈다.

삼겹살 집에 가니 사망 직전의 상추 다섯 장과 새끼손가락만 한 고추 두 개가 나왔다. 채소보관법을 특허 내면 팔자 고칠 수 있겠네, 스무 살 넘은 냉장고로 이 정도 전과를 올렸는데, 인공지능제어시스템을 도입하면 늦여름이나 겨울에 대박 날 거야, 시설자금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하고, 뭐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이고 건설적 상상을 쏟아내는데…      
“꿈 깨셔”  
아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장마철에도 집집이 남아도는 채소가 냉장고에 그득한데 뭔 헛소리냐고.  
 
오늘의 나머지 공부: 궁상떨지 말자.  
 
삽질일기

삽질일기

옥수수를 따내니 줄기가 금세 마른다. 임무를 다 마쳤다는 얘기다.

옥수수를 따내니 줄기가 금세 마른다. 임무를 다 마쳤다는 얘기다.

 
옥수숫대를 쳐내고 키 큰 풀 이발을 하고나니 밭둑이 훤해졌다.

옥수숫대를 쳐내고 키 큰 풀 이발을 하고나니 밭둑이 훤해졌다.

3.
장마 지난 지금 내 밭은 아수라장이다. 잎채소가 있던 자리는 아마존 밀림이 돼 경계를 알아볼 수 없다. 몇 포기 살아남은 양배추는 수풀 속에서 구조요청을 보내고 있다. 옥수수는 철이 지났고, 토마토는 절정을 넘어섰고, 오이 덩굴마저 시들하다. 고추도 절반은 말라죽었다. 농사 동무 오 이장이 풀을 뽑고 상추씨를 뿌린 밭 하나만 그나마 빼꼼하다. 허리까지 자란 풀을 쳐내며 통로를 내는 데 낫질 몇 번 하자 등골을 타고 땀이 줄줄 흐른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지기에 샘가로 튀었다.  
 
오늘의 결론: 열흘만 참자. 햇살이 꺾였다.      
 
또 서리를 당했다. 이번에는 속이 차오르기 시작한 양배추다. 먹잘 것도 없을 텐데 너무들 하셔.

또 서리를 당했다. 이번에는 속이 차오르기 시작한 양배추다. 먹잘 것도 없을 텐데 너무들 하셔.

 
허리를 펴니 하늘이 뱅뱅 돌았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러나 싶었다. 낫을 던지고 샘가로 줄행랑을 쳤다. 오후 1시경이었다.

허리를 펴니 하늘이 뱅뱅 돌았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러나 싶었다. 낫을 던지고 샘가로 줄행랑을 쳤다. 오후 1시경이었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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