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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잊은 지 오래”…미군 공습에 중공군 두더지 생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9>

항미원조 기간 중국 각지에서 이런 정경이 벌어졌다. 1951년 봄, 충칭(重慶)의 항미원조 의연금 접수처에 운집한 노동자들.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 기간 중국 각지에서 이런 정경이 벌어졌다. 1951년 봄, 충칭(重慶)의 항미원조 의연금 접수처에 운집한 노동자들. [사진 김명호]

중공(중국공산당)은 선전과 선동에 일가견이 있었다. 수십 년간 지하에서 연마한 전문가들이 많았다. “인민은 무지한 집단이다. 위대하다고 부추기면 진짜 그런 줄 안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여론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다루려면 여론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마무리만 잘하면 된다”고 확신하는 선수들이 당내에 즐비했다. 6·25전쟁 참전 후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밥하는 연기 보이면 융단 폭격
동트기 전 한 술 뜨고 낮엔 굶어

습한 동굴 속 온몸에 이 들끓어
비타민 결핍으로 야맹증 시달려

올챙이 든 컵에 물만 부어 마셔
솔잎 달여 먹으며 영양소 보충

이승만이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김일성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스탈린에게 매달렸다. “통일전쟁 일으키겠다.” 스탈린은 한반도 분할을 기획한 얄타회담의 당사자였다. 협약을 깰 생각이 없었다. 마오쩌둥을 끌어들였다.  
  
김일성 말 안 믿은 스탈린, 마오 등 떠밀어
 
지원군에게 함량미달 약품 납품하다 적발된 상하이 다캉(大康)약방 주인 왕캉넨(王康年). 체포 다음날인 1952년 2월 8일 오전, 형장으로 직행했다. [사진 김명호]

지원군에게 함량미달 약품 납품하다 적발된 상하이 다캉(大康)약방 주인 왕캉넨(王康年). 체포 다음날인 1952년 2월 8일 오전, 형장으로 직행했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신중국 선포 직후였다. 처음에는 주저했다. 대만 점령과 토지개혁, 국민당 잔존세력 제거, 티베트 해방, 경제건설 등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김일성은 마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일을 저질렀다. 스탈린은 미국이 절대 참전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호언을 믿지 않았다. 마오의 등을 떠밀었다. 신중국은 소련의 원조가 절실하던 때였다. 스탈린의 손길을 뿌리칠 형편이 못 됐다.
 
남의 나라에 파병하려면 명분이 중요했다. 미 7함대가 대만해협을 봉쇄하자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중국인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구호를 내걸었다. ‘항미원조총회’도 신설했다. 형식은 순수 민간단체였다. 간부들도 비당원으로 구성했다. 실권은 중공 지하당원들이 쥐고 있었다. 회장은 문단과 학계의 맹주(盟主) 궈뭐뤄(郭沫若·곽말약)가 맡았다. 궈뭐뤄는 북한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최용건, 김두봉, 홍명희, 이극로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항미원조총회는 전 국민 상대로 ‘스톡홀름 평화선언’ 지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일주일 만에 2억2353만1898명이 서명했다(1950년 11월 28일자 인민일보). 총회는 위문품과 무기 구입에 쓸 헌금도 독려했다. 온 중국이 광기에 휩싸였다. 봉급 자진 헌납하는 노동자와 숨겨 놓은 돈 들고나오는 농민들이 전국에서 줄을 이었다. 결혼식 날 지원군에 자원한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등장했다. 신랑의 말이 엄청났다. “피와 땀이 두렵지 않다.” 한 시인이 이들을 쭈이 커아이더 런(最可愛的人),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4만여 명이 혼인 서약과 동시에 지원군 자원서에 서명했다. 여자 잘 만난 청년들도 있었다. 신붓감이 귀에 대고 몇 마디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혼을 늦췄다.
 
6·25전쟁은 현대화 전쟁이었다. 미국은 모든 기술과 무기를 동원했다. 중국지원군은 곤욕을 치렀다. 국내에서 치른 항일전쟁이나 국공내전과는 비교가 안 됐다. 펑더화의 정보비서가 구술을 남겼다. “국민당 군은 공군이 있기는 했지만, 강하지 못했다. 폭탄도 엉뚱한 곳에 투하하기 일쑤였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에 와 보니 딴판이었다. 매일 미군 비행기가 폭탄을 퍼부어 댔다. 날이 밝으면 활동이 불가능했다. 습기 찬 동굴에 있다 보니 일주일도 못 돼서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 먹는 것도 문제였다. 해 뜨기 전에 한술 뜨면 어두워질 때까지 굶었다. 미군 비행기는 밥하는 연기만 보이면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원군은 무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마오쩌둥도 예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국내 전쟁시절 중공은 국민당군에게서 노획한 무기와 폭약으로 무장했다. 마오쩌둥이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우리의 무기 조달자”라고 큰소리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전리품을 써먹을 수가 없었다. 후퇴하는 미군과 한국군이 자동차 천여 대를 놓고 간 적도 있었다. 워낙 신품들이다 보니 작동하는 법을 몰랐다. 지원군에겐 쇳덩어리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시간만 지나면 비행기들이 나타나 폭탄을 쏟아부었다.
 
전쟁 초기 미 공군은 11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했다. 중국 지원군은 차량 1300대가 수송을 담당했다. 일주일 만에 200여 대가 잿더미로 변했다. 1951년 초, 미 공군기는 1700대로 늘어났다. 지원군 보급차량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지원군의 차량과 물자 손실이 엄청났다.
  
한여름·한겨울에도 얇은 솜옷이 단벌 군복
 
전통극 가수 창샹위는 전국을 다니며 노래를 불러 6개월 만에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해 국민영웅이 됐다. [사진 김명호]

전통극 가수 창샹위는 전국을 다니며 노래를 불러 6개월 만에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해 국민영웅이 됐다. [사진 김명호]

복장도 심각할 정도였다. 중국의 동복은 남방과 북방이 달랐다. 남방은 솜 750g, 북방은 1750g을 사용했다. 한반도에 인접한 동북 출신이 참전했다는 것은 중국 지원군에 대한 어설픈 지레짐작의 하나일 뿐이다. 지원군은 화동과 서북 출신이 많았다. 영하 30도 웃도는 추위에 얇은 솜옷 입고 행군속도가 빨랐다. 온몸이 땀투성이로 눈 위에 매복하다 보니 일어나지를 못했다. 일개 연대가 전투형태 취한 자세로 동사한 경우도 있었다. 4만 명이 전사한 전투에서 2만여 명이 동사자였다.
 
1992년 겨울, 지원군 출신 명출판인 수천(蘇晨·소신)의 회고담 들은 적이 있다. “조선전쟁 시절 신화통신 기자였다. 전선을 여러 번 취재했다. 미군 비행기는 정말 무서웠다. 봄여름에 입을 군복 40만 벌이 불구덩이에 휩싸인 것을 본 적이 있다. 한여름에도 솜옷 외에는 걸칠 것이 없었다. 양식도 부족했다. 미숫가루가 고작이었다. 밤에만 활동하다 보니 태양이 뭔지 잊은 지 오래였다. 야채가 있을 리 없었다. 비타민 결핍으로 야맹증에 시달렸다. 전투력이 저하됐다. 지원군 부사령관 훙쉐즈(洪學智·홍학지)가 묘안을 냈다. 훙쉐즈는 구전되는 민간요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
 
훙쉐즈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항미원조 총회에서 땅콩, 황두, 간유구 등을 보내왔지만 양이 미치지 못했다. 한두 번 먹으면 동이 났다. 주변에서 방법을 찾았다. 병사들에게 솔잎을 달여먹으라고 일러 줬다. 태평양전쟁 기간 일본인들이 남양군도에서 쓰던 방법이었다. 열흘 정도 계속 마시면 효과가 있었다. 소나무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조선은 도처에 개울이 많았다. 영양보충과 피로회복에 올챙이용법을 썼다. 컵에 올챙이 넣고 물 부어 마시기 계속하면 눈이 맑아졌다.”
 
항미원조총회는 돈이 많이 몰렸다. 상하이의 약장수가 가짜 약 공급하다 덜미를 잡혔다. 일벌백계, 체포 다음날 공개 처형했다. 전통극 가수 한 명은 비행기 헌납을 약정했다. 주위에서 비행기가 얼마나 비싼지 아느냐고 핀잔 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국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한 대를 헌납했다. 이름을 따서 창샹위(常向玉·상향옥)로 명명했다. 비슷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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