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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의 보살핌 속 꽃 피운 쇼팽의 음악 인생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6)

이탈리앙 대로에 있었던 카페 토르토니 앞. 이 카페는 19세기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였다. 쇼팽은 토르토니 카페의 커피를 좋아했다. 외젠 게라르(Eugene Charles Francois Guerard)의 채색 석판화. 1856. 카르나발레 미술관.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탈리앙 대로에 있었던 카페 토르토니 앞. 이 카페는 19세기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였다. 쇼팽은 토르토니 카페의 커피를 좋아했다. 외젠 게라르(Eugene Charles Francois Guerard)의 채색 석판화. 1856. 카르나발레 미술관.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파리 귀환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연주회에서 생긴 수입은 재정적 압박을 덜어주었다. 1841년 6월 쇼팽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약 1년 8개월 만에 노앙으로 돌아왔다. 그해 7월 노앙에는 작은 지진도 있었고 비와 폭풍이 몰아쳤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편안함을 얻은 그의 음악은 더욱 무르익어 갔다.
 
쇼팽은 플레옐사와 에라르사에 최고급 피아노를 한 대씩 주문했다. 플레옐 피아노는 속달로 보내졌지만 노앙까지 오는데 5일이 걸렸다. 피아노가 오자 더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달이 바뀌자 날씨는 좋아졌다. 낮엔 상드와 산책도 했고 당구도 쳤다. 상드는 당구를 잘 쳤다. 쇼팽의 실력도 부쩍 늘었다.
 

상드와 함께 노앙으로 귀환  

 
노앙은 쇼팽을 끌어들였다.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 여름 노앙의 시골 축제는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백파이프 연주에 마을 사람들은 민요를 부르며 민속춤을 추었다. 쇼팽은 그들의 리듬을 악보에 옮겼다. 그들의 춤 ‘부레(Bourrée)’는 우아하고 점잖으면서 단순해서 따라 하기 쉬웠다.
 
1841년에도 여러 곡이 출판됐다. 폴로네이즈(작품번호 44)는 무게감에 활력이 넘치고, 발라드(작품번호 47)는 화려하고 편안한 기분을 준다. 그리고 녹턴(작품번호 48-1)은 웅장하고 극적인 전개가 있다. 이제 그의 곡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노앙 생활 이전에 사용되는 것과 달라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심리적인 안정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겨울을 보낼 트롱셰 거리에 있는 쇼팽의 아파트는 습기가 차고 추워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피갈 거리의 상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자신은 염려하지 말라며 트롱셰 거리로 돌아가는 쇼팽의 얼굴은 힘든 표정이었고, 목소리는 가냘팠다. 추위에 떨며 돌아서는 뒷모습에는 따뜻한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이 있었다.
 
쇼팽과 상드가 거주했던 피갈 거리의 아파트가 있던 곳에 걸린 기념판. [사진 송동섭]

쇼팽과 상드가 거주했던 피갈 거리의 아파트가 있던 곳에 걸린 기념판. [사진 송동섭]

 
상드는 자신의 아파트 방을 하나 쇼팽에게 내주었다. 그는 트롱셰 거리의 아파트는 그냥 두고 아예 피갈 거리의 아파트에서 손님도 맞고 레슨도 했다. 방 3개 중 상드의 아들 모리스가 방 하나를 썼고 상드는 딸 솔랑주와 다른 하나의 방을 나누어 썼다.
 
상드와의 사이가 동거인이라기보다는 예술적 동료로 인식되기를 바랐던 쇼팽이었다. 이제 그는 표면상의 독립적인 생활의 모습을 포기했다. 상드의 보살핌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들 정도로 확고했던 것인가. 더 가까이에서 상드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 있어 쇼팽은 심적으로 더 편안했다.
 
쇼팽은 친구 폰타나에게 썼다. “몇 년 전 나는 다른 꿈을 꾸었지.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어. 요즘 내가 꾸는 꿈은 모두 사소한 것들 뿐이야. 나는 요람에 있는 아기처럼 평화로워.” 이것은 마치 마리아의 관계에 대한 회한과 상드가 주는 안정을 얘기하는 것 같다.
 
1841년 12월에는 왕궁으로부터 또 한 번의 연주회 요청이 있었다. 튈르리 궁정에는 약 500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다. 왕궁 연주회에서 쇼팽은 좋은 선물도 받았다. 쇼팽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듬해 2월에는 플레옐홀에서 다시 한번 연주회를 열었다. 순조롭게 진행된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수익은 5000 프랑을 넘었다.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쇼팽과 상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둘의 동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 같았다. 갈채 속에 쇼팽의 음악적 자부심은 더 높아졌고 더불어 수입도 생겼으니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연주회에 온 힘을 쏟은 쇼팽은 연주회를 마치고 얼마간 앓아누웠다. 5월이 되자 쇼팽은 건강에 도움되는 자연이 있고, 편안한 휴식이 보장되는 노앙으로 서둘러 떠났다.
 
산업혁명이 준 변화는 그들 앞에도 열렸다. 그 해 노앙으로 가는 길은 막 부설된 철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오를레앙까지 가는 기차는 덜컹거리며 달렸다. 몸이 약한 쇼팽에게 장거리 여행은 언제나 힘겨운 것이었지만 기차 여행이 마차 여행 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오를레앙에서 노앙으로 가는 구간은 여전히 마차를 이용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53 '영웅'의 자필 악보. 쇼팽의 작품 중 가장 웅장하고 남성적이며, 기법 또한 원숙한 곡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의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53 '영웅'의 자필 악보. 쇼팽의 작품 중 가장 웅장하고 남성적이며, 기법 또한 원숙한 곡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노앙은 다시금 쇼팽의 창작욕을 자극했고 결과물을 만들어주었다. 이 시기 그가 내놓은 곡들은 구성이 커지고 내용은 밝고 건강한 것들이었다. 쇼팽은 연령상 30대 초에 불과했지만, 그의 음악은 이미 원숙미가 넘쳤다. 작품번호 50번부터 54번까지의 마주르카, 즉흥곡, 발라드, 폴로네이즈는 이전 작품보다 더 경쾌하고 자유로운 정서가 가득하다.
 
특히 ‘영웅’이라는 부제로 알려진 폴로네이즈(작품번호 53)는 폴란드의 영광을 그린 것으로 문자 그대로 위풍당당하다. 쇼팽의 곡 중에서 이 곡만큼 웅장하고 남성적인 곡은 없다. 휴고 라이히텐트리트(Hugo Leichtentritt, 1874~1951)에 따르면 이 곡은 폴란드의 정통 남성적 춤곡인 폴로네이즈의 ‘화려함, 명쾌함, 힘 그리고 열정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피갈 거리의 상드 아파트도 계단 때문에 불편함이 있었다. 약해진 쇼팽은 그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쇼팽의 중요한 제자인 귀부인들은 피갈 거리가 자신들의 거주지가 있는 파리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불편해 했다. 계단이 없고 빛이 더 잘 드는 새 아파트를 구하기로 했다.
 
그들이 정한 곳은 당시 핫한 스쿠아르 도를레앙(Square d’Orléans)이었다. 1842년 가을에 파리로 돌아왔을 때 스쿠아르 도를레앙의 9호에는 쇼팽이, 5호에는 상드 가족이 입주했다.
 
쇼팽이 거주했던 방에서 내다 본 수쿠아르 도를레앙의 중앙 정원. [사진 프랑스국립 도서관]

쇼팽이 거주했던 방에서 내다 본 수쿠아르 도를레앙의 중앙 정원. [사진 프랑스국립 도서관]

 
이제 두 사람은 헤어질 때까지 이 아파트에 살게 된다. 그곳에는 친하게 지냈던 마를리아니 가족뿐만 아니라 칼크브레너를 비롯한 음악가, 화가, 작가 등 많은 예술가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아테네로 불리기도 했다. 쇼팽은 그 아파트에 살고 있던 친구 피아니스트 알캉(Charles-Vanlentin Alkan, 1813~1888)에게 입주를 알렸다. “상드와 나는 그곳에 입주하기로 했어. 이제 창문을 통해 자네와 이중주를 연주해도 되겠어.”
 
자주 어울리는 그룹의 사람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에게는 모두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그들은 마를리아니 집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같이 먹고, 상드의 아파트나 쇼팽의 아파트로 자리를 옮겨 나머지 저녁 시간을 차를 마시며 대화하거나 곡을 연주하며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전히 쇼팽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은 멀리서도 찾아왔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은 이때쯤 그에게 왔다. 어린 신동으로 불렸던 칼 필치를 쇼팽은 애지중지했다.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쇼팽의 말년을 챙긴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처녀 제인 스털링(Jane Stirling, 1804~1859)도 얼마 후 그의 문하에 들어온다.
 

쇼팽의 말년을 챙긴 스코틀랜드 노처녀  

 
1843년으로 넘어가며 쇼팽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이제 겨울 뿐만 아니라 봄, 여름에도 앓는 경우가 잦아졌다. 쇼팽의 병은 때로 심해서 상드를 긴장시켰다. 그의 주치의 몰린 박사가 급히 소환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몰린 박사의 특별한 치료법 ‘동종(同種)요법’은 쇼팽의 병을 일시적으로나마 진정시켰다.
 
되돌아보면 1842년이 쇼팽의 음악 인생의 정점이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인 우울한 느낌은 이 시기에는 보기 힘들다. 쇼팽은 모성애적 사랑을 베푼 상드 곁에서 안정을 찾았는데, 그의 천재성이 최고의 높이에서 화려하게 빛날 때 만들어 낸 작품은 오히려 밝고 화려하며 웅장하고 남성적인 음악이었다. 그 결정체는 폴란드의 영광을 그려낸 곡이었다.
 
이후로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한 그가 발표하는 작품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음 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드의 여러 가지 면모에 대한 얘기가 이어진다.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은 그 대회에서 ‘최고 폴로네이즈 연주상’도 동시에 수상했다. 우승 연주회에서 그는 쇼팽의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53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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