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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진정한 극일을 위해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세상이 무너질 듯 호들갑을 떨다가도 막상 일이 닥치면 차분하고 냉정해지는 게 인간이다.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이 되는 순간 사람의 마음가짐은 회피 모드에서 대응 모드로 싹 바뀌기 마련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그걸 막지 못했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도 일이 터지기 전 얘기다.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나면 대응이 우선이다.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편협하고 왜곡된 애국심 아닌
민주주의의 성숙한 시민의식

한국을 ‘수출 절차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아베 정부의 선공(先攻)으로 한·일 경제전쟁의 막이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은)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춰 선다면 영원히 그 산을 넘을 수 없다”면서 “국민의 위대한 힘을 믿고 정부가 앞장설 테니 비상한 각오로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노력은 제대로 안 해 놓고, 인제 와서 ‘국민의 위대한 힘’에 기대는 꼴이 무책임하고 아니꼽게 보일 수 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다. 아베 정부의 공격에 지혜로운 전략으로 슬기롭게 맞서는 게 급선무다. 문재인 정부의 책임 여부는 내년 총선이나 다음 대선에서 엄정하게 따질 일이다.
 
아베 정부가 자유무역 원칙을 무시하고, 대한(對韓) 수출규제에 나선 이유는 명백하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이 직접적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이참에 경제적으로 한국의 기를 확실하게 꺾어놓는 동시에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구축된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한국 배제에 따른 안보 공백을 동력으로 개헌을 추진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로 바꾸는 것이 아베의 속셈이다.
 
미국에 의해 강요된 굴욕적인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 패전 이전의 ‘아름다운 대일본제국’을 재현하는 것이 일본 극우세력의 오랜 염원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통합해 결성한 ‘일본회의’라고 『일본회의의 정체』를 쓴 일 언론인 아오키 오사무(靑木理)는 지적한다. 아베 내각에는 일본회의의 핵심 멤버들이 포진해 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정령 개정안에 대한 의견수렴 결과 4만666건의 의견이 접수됐고, 그중 찬성이 95%를 넘었으며 반대는 1%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베 정부의 공식발표다. 평소 수십, 수백 건에 불과했던 의견 접수 건수가 유독 이번에만 4만 건이 넘은 배후에는 전국 풀뿌리 조직인 일본회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평화의 소녀상’ 일본 전시가 이틀새 1400건에 달하는 테러 협박으로 돌연 중단된 배경에도 일본회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예술적 창조의 원천인 표현의 자유마저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것이 일본 민주주의의 수준이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고, 충분히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했지만, 극일(克日)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결의에 말은 필요 없다. 말은 줄이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극일을 위한 행동의 요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각자 맡은 본분과 소임을 다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정부는 정부의 일을 제대로 하고, 시민은 시민의 일, 언론은 언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서로 존중하면서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한국은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다. 일본과의 경제전쟁 와중에 북한은 이틀이 멀다고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는 한·일 간 틈새를 파고들며 호시탐탐 한반도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동맹국인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과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의 한국 배치까지 요구할 경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제 사태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내부 분열이다.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내부 총질을 해대면 성(城)은 제풀에 무너진다. 우리 사회를 ‘피’(彼)와 ‘아’(我)로 갈라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이다. 관변단체나 친(親)정부 매체를 앞세워 정부가 반일(反日) 감정을 선동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사회 구성원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을 서로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전제될 때 진정한 극일이 가능하다. 일본 상품 안 사고, 일본 여행 안 가는 사람의 선택이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 일본 상품을 사고, 일본 여행을 가는 사람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아베 정권이지 일본인이 아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본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포용하는 품격과 도량을 보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편협하고 왜곡된 애국심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힘으로 일본을 눌러야 한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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