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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임진왜란 화친은 쓰시마의 간지…한·일 교류 중지는 하책이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1592~98)은 동북아의 게임 체인저였다. 조선과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 간 약 200년의 화평을 산산조각냈다. 막부는 일본국왕사를 60여회, 조선은 통신사를 3회 맞파견했다. 교린(交隣)이었다. 히데요시의 침략은 중국 책봉(冊封) 체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명(明)이 참전하면서 왜란은 동북아 7년 전쟁이 됐다. 전장인 조선은 잿더미로 변했다. 성종 왕릉(선릉)이 도굴됐다. 조선에 일본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왜란은 현해탄의 섬 쓰시마(對馬)의 명운도 갈랐다. 조일(朝日) 무역 관문에서 침략의 전초기지가 됐다. 산이 90%인 쓰시마에 교역은 생명줄이다.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는 선린우호에 웃었고 전란에 울었다. 평시엔 외교 사절·무역 독점권자지만 전시엔 향도였다. 쓰시마의 지정학이 빚은 숙명이다.
 
전후 쓰시마는 벼랑 끝으로 몰렸다. 돈줄이 말랐다. 무역 재개는 쓰시마에 사활의 문제였다. 요시토시는 외교의 첨병으로 돌아왔다. 종전되자마자 부산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사신 파견을 거듭했지만 국교 회복은 먼 길이었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 장악은 전환점이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토시에 조선과의 복교 모색을 명한다. 원래 조선 침략에 소극적인 그였다. 조선도 일본 새 권력의 진의 파악이 급했다.
 
조선은 1604년 승병장 사명대사(유정)를 사절로 보냈다. 오늘날의 막후 채널이다. 유정은 이듬해 교토에서 이에야스와 만난다. 이에야스는 “나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 조선과 원한이 없으며, 통화(通和)를 청한다”고 했다(『조선통신사』, 나카오 히로시). 조일 관계는 새 국면을 맞았다.
 
1606년 조선은 복교의 조건을 요시토시에 전한다. 왕릉 도굴범 인도, 일본 국왕의 사죄 서한, 피로인(억류 조선인) 송환이었다. 요시토시의 간지(奸智)가 발동했다. 그해 말 요시토시는 이에야스 국서를 건넸다. 도굴범 두 명도 인도했다. 국서에는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친다”는 구절이 들어갔다. 국서와 국새는 요시토시가 위조한 것이었다. 도굴범은 쓰시마의 죄인 중에서 골랐다. 조선에선 국서의 진위 논란이 불거졌다. 도굴범은 너무 젊어 선조 스스로 의문을 표시했다. 조선은 더 진위를 가리지 않았다. 이듬해 통신사 파견의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통신사가 지참해온 선조의 국서가 문제가 됐다. 표지가 ‘봉복(奉復·답서)’으로 돼 있었다. 국서를 보낸 적이 없는 이에야스가 보면 위조가 들통난다. 요시토시는 선조의 국서까지 위조한다. 봉복을 ‘봉서(奉書)’로 바꾸었다. 내용도 이에야스가 납득하도록 고쳤다. 그러곤 통신사의 이에야스 면담 하루 전 가짜를 진짜와 바꿔치기했다. 면담은 국교 회복의 길을 열었다. 30년 후 요시토시의 국서 위조가 불거졌지만 막부는 불문에 부친다.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간 또 다른 200년은 위조 국서 위의 선린우호다. 그러나 화친은 가짜가 아니었다. 성의와 믿음으로 사귄다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이 뿌리내렸다. 출발은 쓰시마의 먹고사는 문제였다.  
 
한·일 관계가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버팀목인 경제마저 디커플링이 일어날 판이다. 정치는 전략적 시각차를 넘어 이질(異質)의 세계 같다. 시스템과 문화의 충돌인가. 서로 초점이 다른 소리만 한다. 이대로는 해법의 퍼즐을 맞출 수가 없다. 언력(言力)도 실종됐다. 지방 간 교류 중지도 잇따른다. 완충지대를 없애는 것은 하책이다. 보복과 단절의 희생양은 현장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하지 않는가. 한·일 경제계의 막후 역할이 한 가닥 희망이다.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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