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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 강조한 베버 사상에 공감…‘장식’ 보다 ‘기능’ 최우선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6>

“왜 독일 음식은 그렇게 맛이 없어요?”
 

서구 자본주의 발전 원동력으로
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꼽아
전쟁에서 진 독일 사회에 큰 영향

북유럽 음식 간소하고 그릇 심플
바우하우스의 공방서 기능 교육

내가 독일에서 유학했다니까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매번 내게 묻는다. 거 참, 말문이 막힌다.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 독일 음식만 맛없는 게 아니고 북유럽 음식은 죄다 맛없다. 와인 잔과 같은 식기류만 아주 폼 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풍의 요란스러운 그릇과는 달리 절제된 우아함이 있다. 그걸 ‘기능주의’라고 한다. ‘우아하고 품위있지만 기능성이 극대화된 독일 식기에 담긴 아주 맛없는 독일 음식’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체로 소박한 독일 음식. [사진 윤광준]

대체로 소박한 독일 음식. [사진 윤광준]

최근 서울에 들러 책방에서 독일 역사에 관한 짧은 책을 읽다가 ‘아, 왜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미처 생각 못했을까!’하고 무릎을 쳤다. 일본의 이케가미 슌이치(池上俊一)가 쓴 『숲에서 만나는 울울창창 독일 역사』라는 작은 책이다. 유럽 문화사를 흥미로운 작은 주제 중심으로 써나가는 그는 독일 음식이 맛없는 이유가 아마 ‘종교개혁’ 때문일 것이라고 스쳐 지나가듯 주장했다. 유럽에서 미식 문화가 꽃피운 곳은 가톨릭 국가들이며, ‘현세를 즐기는 것’을 적대시했던 프로테스탄트가 북유럽 맛없는 음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 걸까. 그 후 며칠을 집중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옳다! 그러나 독일 음식이 맛없는 이유를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독일 음식이 맛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청렴한 부자일수록 천국 간다’ 주장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막스 베버. [사진 윤광준]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막스 베버. [사진 윤광준]

베버는 바우하우스의 그로피우스와 동시대 사람이다, 물론 나이는 베버가 훨씬 많았다(베버는 1864년, 그로피우스는 1883년생이다).
 
베버의 사상은 전쟁에서 패한 독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사망 직후인 19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역사 현상의 설명 방식에 있어 마르크스의 단선론적 역사 발전론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설득력 있는 가설로 각광받았다.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것’(생산력과 생산관계)을 사회 변동의 힘으로 파악했던 반면, 베버는 ‘정신적인 것’(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이 자본주의 생산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왜 하필 자본주의가 서유럽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베버는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의 교리와 연결시켜 대답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을 수용한 유럽의 근대 시민계급은 자본 축적의 양을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로 생각했다. 돈이 쌓일수록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 즉 신앙심의 깊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방탕과 향락은 천국에서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향락과 방탕에는 ‘맛있는 음식’을 탐닉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재산의 축적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보다 효율적인 자본축적을 가능케 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는 것이다(물론 베버의 가설에 반대되는 팩트도 많다).
 
‘금욕’과 ‘저축’의 자본주의 정신을 베버는 독일어의 ‘직업’을 뜻하는 ‘베루프(Beruf)’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베루프’는 마틴 루터의 독일어번역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다. 신의 ‘부름’과 ‘소명’(영어로는 ‘calling’)을 ‘부른다’는 뜻의 독일어 ‘베루펜(berufen)’으로 번역했다. ‘베루프’는 ‘베루펜’의 명사형이다. 이렇게 독일어에서 신의 ‘소명’과 ‘직업’이 같은 단어가 된 것이다.
 
특히 칼뱅주의는 신의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강조했다. 현실에서의 직업은 신의 소명이기에 충실하게 돈을 벌어야하며, 그렇게 번 돈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돈은 쓰기 위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 위해 모으는 것이며 그렇게 쌓인 돈은 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수단이 된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부자의 하늘나라 가기’가 베버의 이론에서는 오히려 ‘부자일수록 하늘나라에 더 잘 갈 수 있다’는 희한한 반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바우하우스 도기 공방의 학생이었던 테오도르 보겔러의 작품. [사진 윤광준]

바우하우스 도기 공방의 학생이었던 테오도르 보겔러의 작품. [사진 윤광준]

물론 베버가 이야기하는 부자는 돈을 전혀 쓸 생각이 없이 쌓아두기만 하는, ‘청렴한 부자’를 뜻한다. 20세기 초반에는 사뭇 황당했던 이 같은 베버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흥미롭게 여겨진다.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역사 발전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베버나 게오르그 짐멜의 이론에서 강조되는 ‘정신적인 것’들의 기능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베버의 주장과 ‘맛없는 독일 음식’을 연결시키면 왜 프로테스탄티즘이 강했던 북유럽의 음식이 맛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맛있는 음식, 진귀한 음식을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향락’이다. 미각은 물론 시각까지 자극하는 다양한 음식의 가톨릭 문화와는 달리 북유럽의 음식은 간소하고 간결하다. 감자와 소시지는 가장 프로테스탄트적인 음식이다. 음식을 담는 식기 또한 화려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능성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적으로는 매우 효율적이어야 한다. 칼은 고기를 잘 썰어야 하며, 식기는 잘 깨지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 사용하기에도 편해야 한다. ‘기능성’이야말로 북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허영’이었다.
 
귀족적인 취향의 아르누보풍 배척
 
도기 공방의 ‘형태 마이스터’였던 게르하르트 마르크스의 1924년 사진.

도기 공방의 ‘형태 마이스터’였던 게르하르트 마르크스의 1924년 사진.

베버식으로 설명하면, 프랑스의 ‘아르누보’나 오스트리아의 ‘유겐트슈틸’이 독일에서는 투박한 기능주의적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변질된 이유가 사뭇 그럴듯해진다. 왜 바우하우스와 같은 기능주의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하필 독일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에서 화려한 장식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귀족적 취향의 아르누보풍은 제거해야할 대상이었다(‘장식은 죄악’이라는 빈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칼뱅주의적이다). 이제 ‘장식’이 아니라 ‘기능’이 추구해야할 최우선의 가치였다. 기능은 추상적 토론이나 이론이 아닌 구체적 현장, 즉 ‘공방(Werkstatt)’에서 구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공방은 귀족이나 교회의 일방적 요구에 따라야 했던 중세의 공방과는 달랐다. 전쟁 후, 새로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한 시민사회의 가치에 상응하는 기능을 구현해야 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에서는 새로운 세상의 혁명적 이론으로 무장한 ‘형태 마이스터’와 기능을 구체화할 수 있는 ‘수공예 마이스터’가 하나의 공방에서 함께 가르쳤던 것이다.
 
도기 공방이 가장 먼저 활발해졌다. 실습장은 물론 실습장비마저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다른 공방들에 비해 도기 공방은 개교한 후 바로 바이마르의 화로 공장에 있는 가마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바이마르에서 25km 떨어진 도른부르크(Dornburg)에서 제대로 된 공방을 찾았다.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 인근에서 유명했던 도자기 장인 막스 크레한(Max Krehan·1875~1925)을 ‘수공예 마이스터’로 스카우트했기 때문이었다. 이곳 학생들은 공방이 바이마르에서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자기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본교에서 일어나는 이념적 혼란과 각종 갈등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런 만큼 도기 공방의 작품들은 바우하우스 특유의 실험적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도기 공방의 ‘형태 마이스터’는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1889~1981)가 맡았다. 조각가였던 그는 그로피우스와 더불어 ‘예술을 위한 노동평의회’의 멤버였다. 그로피우스와는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쾰른 전시회부터 인연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로 초빙한 최초의 선생 3명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함께 초빙된 이텐이나 파이닝거에 비해 그리 큰 존재감은 없었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아방가르드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추상화 경향에 반대했다. 그의 조각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전통적 예술관에 충실했다. 다행히(?) 도기 공방이 바이마르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마르크스는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하던 1925년까지 큰 문제없이 바우하우스에 머물 수 있었다.
 
독일 전통적 ‘기능주의’에 충실했던 마르크스와 크레한의 도기 공방은 도기를 대량생산하여 가장 먼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바우하우스의 공방 중 가장 먼저 ‘돈’을 벌었던 도기 공방은 학생들의 수업료와 생활비까지 지원할 수 있었다. 학교재정 문제로 골치 아팠던 그로피우스는 그런 도기 공방의 마이스터들과 학생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나 1925년 넉넉한 성품의 아버지 같았던 크레한은 갑자기 죽고, 마르크스는 미련 없이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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