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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흉물과 은물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인삼 한 쌍이 사이좋게 좌대 위에 올라 있다. 수염 난 사내가 앞섶을 풀어헤치고 붉은 고추를 든 채 엄지 척을 하고 있다. 거대한 전복이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흉물이다.” 한국의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많이 만날 수 있는 조형물들이다. 지역 특산물을 소재로 한 지역 마케팅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꼭 이렇게 노골적이고 왁자지껄하고 흉악스럽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것을 흉물로 보는 시선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그냥 그렇게 저렇게 드러내놓고 이 풍진 세상 한바탕 살다 가겠다는데 괜한 엄숙주의로 시비를 거는 것일까. 그렇지만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흉물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 우리 사회에는 이런 흉물이 넘칠까. 한국인의  미 수준이 원래 이래서? 전통 건축이나 공예품들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근대화 과정에서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계승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한해에만 2만5000명의 디자인 전문가가 배출된다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저런 것들이 활개를 칠 수 있을까. 솔직히 디자인 평론가로서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현대디자인은 은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 위치한 ‘강남스타일’ 조형물. 싸이 노래와 말춤을 큰 손으로 형상화했으나 미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중앙포토]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 위치한 ‘강남스타일’ 조형물. 싸이 노래와 말춤을 큰 손으로 형상화했으나 미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중앙포토]

백 년 전 독일에서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미술교육의 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존재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미술교육의 모델이 되어온 아카데미는 모방(mimesis)을 주된 교육 방법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미술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뛰어난 작품을 따라 하는 식의 교육을 했던 것이다. 석고 데생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바우하우스는 그러한 아카데미 방식을 부정했다. 대신에 본 교육 이전에 ‘예비과정(Vorkurs)’이라는 것을 거치도록 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장 먼저 초빙한 선생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 교육자인 요하네스 이텐(Johaness Itten)이었는데, 예비과정을 만든 것은 그였다. 이텐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의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이제까지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고 말했다. 스승 따라 하기의 아카데미 방식을 부정하고 가까운 주변의 사물에서 직접 조형의 원리를 찾아내도록 했다.
 
이텐의 방식은 프뢰벨의 유아 교육에서 온 것이었다. 이텐 자신이 프뢰벨 교사 출신이었다. 프뢰벨은 세계 최초로 유치원을 만든 사람이다. 유치원을 뜻하는 독일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은 ‘아이들(Kinder)’의 ‘정원(Garten)’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 유치원 다니던 조카가 부르던 노랫말이 생각난다. “우리 유치원~ 우리 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그렇다. 유치원은 아이들의 꽃동산인 것이다. 아이라는 씨앗을, 교사라는 정원사가 키워내는 곳, 그것이 바로 유치원이다.
 
프뢰벨은 ‘은물(恩物, Gabe)’이라는 독특한 교구를 개발했는데, 이는 신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뜻이다. 프뢰벨은 ‘범재신론(凡在神論)’,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을 가진 신비주의자였다. 이는 마치 모든 중생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불교 사상과도 비슷하다. 프뢰벨의 은물은 나무토막이나 털실 뭉치 같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그는 이런 일상적인 사물들을 통해 신이 설계한 우주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디자인과 연결되는데, 바우하우스의 합리주의 조형이 이러한 비합리주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바우하우스의 예비과정은 미술의 유치원이었던 것이다.
  
흉물, 괴물, 은물
 
바우하우스의 사례는 오늘날 한국 디자인에 물음을 던진다. 왜, 한국에는 디자인 전문가가 이렇게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흉물이 넘치는 것일까? 프뢰벨의 은물이나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초월성이나 내면성이 결여된, 한국적인 샤머니즘 때문일까. 이러한 정신성이 지방자치시대의 관료주의 미학과 결합하여 나타난 것일까.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흉물들을 보면서 이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제어되지 못한 괴물들임을 깨닫는다. 한국 디자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흉물이 아닌 은물과 같은 선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한국의 지역을 흉물 동산이 아닌 꽃동산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나의 물음은 이것이다.
 
최범 디자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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