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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조국을 역지사지한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천년 중국철학사에서 딱 하나의 명구를 고르라면 나는 이것을 꼽겠다. ‘역지사지(易地思之)-입장 바꿔 생각하라’. 지금 이 땅에 꼭 필요한 교훈도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역지사지의 눈으로 보면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광폭 반일 행보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법무 참모는 냉철한 이성과 엄정한 법리(法理)의 상징이다. 하지만 한·일전이 벌어지자 그는 이성과 법리 대신 단호하고 거친 언어로 편을 갈랐다. 정권과 자신은 정의의 편에, 야당과 비판 언론은 악의 축에 올렸다. 그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을 부정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판결을 비방·매도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일지 몰라도, 무도하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이다”라고도 했다.
 

집행하기 어려운 판결을 놓고
비판=매국으로 몰아가는 건
민주 독재 인증하겠단 뜻인가

싸움은 피할 수 없다면 이겨야 한다. 나라 간 싸움은 더욱 그렇다. 이기려면 똘똘 뭉쳐야 한다. 편을 가르면 진다는 걸, 동네 애들도 안다. 오합지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밖과 싸우자며 안을 때리는 건 다른 뜻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조국이 누군가. 이 정부 핵심 중 핵심이자 보수 정권 시절 『진보집권플랜』을 쓴 좌파의 최고 전략가 아닌가.
 
나는 그의 ‘반일(反日) 프레임’이 만들어 낸 결과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8개월 만에 최고로 올랐다. 완강히 버티던 자유한국당마저 5+1 청와대 회동을 스스로 제안하고 들어왔다. 나 홀로 죽 쓰는 한국 경제에 대한 면피용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내년 총선에 이만한 호재가 없다.
 
다시 역지사지해보자. “사법부의 판결은 존중돼야 한다”는 그의 말은 백번 맞다. 하지만 집행력을 가졌느냐는 별개다. 신용=의사+능력이다. 아무리 빚을 갚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능력(돈)이 없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 맞는 판결이라도 집행 대상이 미국·중국·북한·일본 같이 센 나라라면 우리의 사법 의지대로만 할 수는 없다. 하물며 국내 판결도 김경수 경남지사 구속 판결이 잘못됐다며 해당 판사를 탄핵하자던 게 현 집권 세력 아닌가.
 
또 역지사지해보자. 네 가지 경우다. ①반일 애국단체가 소송을 냈다. ‘경제 침략의 죄를 물어 아베 총리를 탄핵하라.’ 한국 사법부가 ‘보편적 세계 경제 질서 위반’이라며 탄핵을 결정했다. 이건 어떻게 집행하나. ②일본 사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벌금 1억엔을 선고했다. 안 내고 버텼더니 주일 한국 대사관 재산을 압류한다고 한다. 눈 뜨고 고스란히 뺏겨야 하나. ③롯데가 중국의 사드 보복 피해 보상 소송을 냈다. 한국 법원이 중국 정부에 2조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누가 어떻게 받아올 것인가. 안 주면 전쟁이라도 할 건가. ④6·25 전쟁 피해자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억원씩 배상 판결이 났다. 어느 간 큰 정부가 집행할 것인가.
 
①~④의 판결이 이뤄지고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조 전 수석의 ‘원리주의적 판결 지상주의’에 맞춰 극단의 가정을 해봤을 뿐이다. 이 네 가지를 대한민국이 다 할 수 있다면, “죽창을 들자”는 그의 말을 나는 100% 따를 것이다. 맨 앞에서 머리띠를 둘러메고 뛰어나가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의 죽창과 반일, 편 가르기는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빠르게 망가뜨리는 정치공학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제껏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산다고 생각해왔고, 이 둘을 한 번도 분리해 본 적이 없다. 민주 없는 자유가 어디 있으며, 자유 없는 민주가 어디 가능하랴고 믿어왔다. 요즘 들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자유와 민주,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100% 자유 쪽이다. 의견이 다르다며 친일·매국의 굴레를 씌워 척결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 독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정부가 지난 세월 물리치고자 싸워왔다던 바로 그 괴물, 독재인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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