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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해야”…서거 60주기 추모식

31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병준 기자

31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병준 기자

31일 오전 10시 30분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망우리공원으로 향하는 차들이 줄을 이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비가 쏟아져 발밑이 온통 진흙밭이었지만 사람들은 각기 차에서 내려 한 묘역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망우리 공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공원 주차장에서 40분쯤을 걸으니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역이 나왔다. 선생이 묻힌 봉분 앞에는 오전부터 내린 비를 피하지 못한 그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박과 포도, 참외, 황태포로 간단히 차린 상이 자리했다. 그 주위로 문재인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늘어섰다.
 
추모식은 오전 11시 무렵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의 개회사로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 박남춘 인천광역시 시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어 죽산 조봉암 선생의 1956년 진보당 창당 개회사 육성이 흘러나왔다. 신경림 시인의 ‘그날’이 추도시로 낭송되는 동안에도 대부분 고령인 참가자들이 꾸준히 조봉암 선생의 묘역 근처로 걸어왔다.
31일 오전 서울시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안개가 가득하고 발 밑이 진흙밭으로 변했지만 추모객들은 개의치 않는 듯 계속해 자리를 함께했다. 이병준 기자

31일 오전 서울시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안개가 가득하고 발 밑이 진흙밭으로 변했지만 추모객들은 개의치 않는 듯 계속해 자리를 함께했다. 이병준 기자

“독립운동가 유공자 인정하고 재조명해야”

곽 회장은 개회사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평등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한반도를 만드는 데 일생을 바치신 분”이라며 “항일운동가 조봉암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하고 제대로 된 평가와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과 철학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남춘 인천광역시 시장도 추도사에서 “독립유공훈장 추서가 이른 시일 내에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단체와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지난 4월에도 “인천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선구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은 인천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일”이라며 “낡은 이데올로기적 색안경을 벗고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선생의 뜻을 이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인천시의 후원을 받아 죽산의 의정활동 어록 등이 담긴 자료집을 만들어 연말 발간을 앞두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인천시와 함께 죽산 묘역과 주변 경관 재정비작업도 진행하기로 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손녀 이성란(59)씨가 내빈에게 답사를 하고 있다. 이병준 기자

죽산 조봉암 선생의 손녀 이성란(59)씨가 내빈에게 답사를 하고 있다. 이병준 기자

이날 추도식에 참석한 조봉암 선생의 손녀 이성란(59)씨는 “어머니께서 할아버지(조봉암)가 더위를 많이 타셔서 옥중에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며“할아버지께서는 공석에서 냉철하고 빈틈이 없으셨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고 자상하신 분이셨다”고 울먹였다. 이어 “매년 잊지 않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해주셔 감사드린다”며 인사를 전했다.
 

'진보당 사건' 간첩죄로 사형당해

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9년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1919년 고향인 강화도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등 국내와 중국·소련·만주 등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에는 전향을 선언했다. 제헌국회 의원을 지냈고 2대 국회에서는 국회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먼저 챙긴 뒤 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소수의 대지주에게 모여 있던 토지를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분배 혹은 유상 지급하는 정책이었다.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위치한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이병준 기자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위치한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이병준 기자

제2·3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이승만 후보와 경쟁했다.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 선생은 2년 뒤 간첩죄 등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이 조봉암 선생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하고 양이섭의 자백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었다. 선생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2심과 3심에서 각각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청구가 기각된 지 17시간 만의 일이었다.

 

'52년 만에 재심으로 무죄 선고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11년에서야 조봉암 선생은 누명을 벗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지난 2007년 9월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했다. 이어 국가에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에 상응하는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당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송기인 신부는 이날 추도식에 축사를 전해오기도 했다.
 
이듬해 유족들이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2년여의 심리 끝에 지난 2011년 재심에서 조봉암 선생에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심석용·이병준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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