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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어느 나무의 이야기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영문학 교수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영문학 교수

나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세상에 심어졌습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지요. 나무는 자신을 존재하게 한 대(大)존재의 명령대로 자신의 세포를 분열시키고 기관을 만들며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도, 천둥 번개가 치는 검은 밤에도 나무의 목적은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의 세상은 온갖 위험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만, 그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그저 ‘살아내는’ 것만이 목표이었습니다. 나무 주변에는 다른 나무들도 있었습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나무들은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이 작은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지에는 영양분이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을 먼저, 많이 차지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변에는 또한 이 나무와 별다를 바 없이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어린나무들도 있었지요.  
 

“우둔한 영혼들아. 나를 보렴”
다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아는 것
낮고 약한 것들의 푸르른 생명성

나무는 큰 나무, 작은 나무들과 겨루며 많은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큰 나무의 그늘에 가려졌을 때는 햇빛을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통증으로 어깻죽지가 마비될 때까지 손을 내밀었으나 햇빛 한점 받지 못한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며칠 지속 되면 이파리가 누렇게 뜨기 시작했고, 나무는 죽음의 징후를 느끼기도 했지요.
 
나무는 이 모든 위기와 고통과 경쟁의 시간을 거치며 점점 더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큰 나무들이 마침내 수명이 다해 쓰러지는 것도 보았고, 어린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병이 들어 수족이 흉하게 뒤틀리기도 했습니다. 나무의 가슴 속에도 수많은 고통으로 여기저기 옹이들이 배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무는 스스로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저 생명의 황금 나무”(괴테)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요. 물론 여기에서 “나무”는 일종의 상징이긴 하지만요.  
 
나무는 자신이 “황금 나무”로 완성되기를 꿈꾸었습니다. 나무의 정신이 저 지고한 곳을 향할수록 세상은 더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그럴수록 나무의 기준은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황금빛을 띠며 우람하게 커가는 나무를 보고 기가 죽었습니다. 이제 나무의 눈은 예리할 대로 예리해져서 한눈에 사물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가 볼 때 어리석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통찰이 부족한 나무들은 이 나무와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무들과의 시간은 이 나무에게 견딜 수 없이 지루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무는 자신이 “황금 나무”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관계를 멀리했습니다. 정신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했고, 쓸데없는 일로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지요.
 
이제 커질 대로 커진 나무는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세상의 맨 꼭대기에 있는 태양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이야말로 나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기 때문이지요. 나무는 빛나는 태양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영혼의 “황금”이 연단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환희가 나무의 온몸을 물들였습니다. 나무는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나무는 이미 “황금 나무”의 영혼이 어떤 것인지 알아버렸습니다. ‘세상의 이 모든 어리석은 것들아, 우둔한 영혼들아. 나를 보렴.’ 나무가 이렇게 속으로 외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공기조차 검게 물들어 나무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엄청난 에너지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나무는 보았습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거대한 칼로 변했습니다. 불의 칼은 순식간에 나무의 정수리를 내려쳤습니다. 나무는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무는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다 무너진 후에야 나무는 알았습니다. 자신의 꿈이 바로 “회색의 이론”들이었음을. 푸르른 “황금 나무”는 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 약한 곳, 아픈 곳, 어리석은 곳에 있었습니다. 불의 칼에 쓰러진 나무의 밑동에, 어리고 푸른 이파리 몇 개가 간신히 팔랑이고 있었습니다. 다 죽어가면서 나무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게, 이것이, “푸르른 생명의 나무”임을.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영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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