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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 카드 꺼낸 정부…52시간제, 화학물질 인허가, 세액공제까지 푼다

일본 정부가 한국으로 가는 반도체ㆍ디스플레이용 소재의 수출 제한에 나선 지 17일째를 맞았다. 기획재정부ㆍ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경제정책 부처는 일본의 ‘몽니’가 길어질 것에 대비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간의 정책 기조와 달리 이번에는 대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한 게 특징이다.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비하고, 연구개발(R&D) 투자 촉진으로 핵심 기술의 '탈(脫)일본'을 앞당기겠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2019.7.19/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2019.7.19/뉴스1

사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가 가시화되기 전까지 한국 정부는 안이한 태도를 보이다 허를 찔렸다. 지난달 30일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의 관련 보도가 나오기 전부터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보복을 예고했고, 일본의 움직임이 국내외 언론은 물론 기업ㆍ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되려 사태 발발 직후 정부의 한 간부는 삼성ㆍSKㆍLG 등의 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들은 일본에 지사도 있고 정보도 많을 텐데 사전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증폭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보복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우리 정부도 대응책 마련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3일 홍남기 부총리가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을 면담한 것을 시작으로 정부는 기업과의 ‘민관 공조’ 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3개 핵심소재의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이번 사태가 자동차와 화학 등 전 산업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준비에 나섰다.
 
정부는 단기 대책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영향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는 소재ㆍ부품을 국산이나 다른 수입선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점검 중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확대에) 영향받을 해당 품목이 1000여개라고 하는데 실제 조치가 이뤄졌을 때 어떤 품목이 중점이 될지, 밀접한 품목은 어떤 것인지,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분석하고 있다”면서 “일차적으로 다음 주 중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장기 대책으로는 재정 확대는 물론 행정절차 간소화, 세제ㆍ금융지원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망라했다. 그간의 대(對)기업 규제 일변도에서 탈피해,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 인사 초청 간담회에서 주요 기업인이 요청한 사항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다.
 
우선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 특례 확대 방침을 공식화했다. 국산화 속도를 내기 위해 실증테스트 등으로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경우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 특별연장근로는 천재지변이나 그에 준하는 재해ㆍ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절차를 거쳐 1주일에 12시간 이상의 연장근로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다만, 대상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일본 수출규제 품목 관련 업체로 확인한 기업으로 한정한다.
 
최근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고순도 불화수소 등에 대한 대체재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이들 기업이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할 경우 한시적으로 이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R&D 인력 등이 재량근로제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이달 말까지 관련된 ‘가이드라인’도 도 제공하기로 했다. 재량근로제 적용 근로자는 실질적으로 주 52시간 근무를 엄격히 지킬 필요가 없다. 앞서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 인사 간담회에서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은 “제품 R&D를 진행하다 보면 한 프로젝트에 반년가량을 매달려야 한다”는 업계 분위기를 전하며 주52시간제 등 노동정책 유연화를 요청한 바 있다.
 
또 제품 개발을 위한 R&D 등 필요한 부분에 한해 화학물질 인허가 기간을 단축한다. 신규 화학물질이 신속하게 출시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소재 부품의 ‘탈 일본’을 위해 행정적 절차를 줄여주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에칭가스 등 일본 의존도가 높은 화학물의 경우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묶여 현실적으로 조속한 국산화가 쉽지 않다는 기업들의 요구를 반영한 조치로 해석된다. 아울러 이번 추가경정예산안 및 2020년도 예산안에 소재ㆍ부품산업 지원 예산을 최대한 담겠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신속한 기술개발이 필요한 핵심 R&D 과제의 경우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된다. 예비타당성조사는 정부의 재정 지원이 포함되는 대규모 신규 사업에 대해 경제성, 재원 조달 방법 등을 검토해 사업성을 판단하는 절차다. 길게는 1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신속한 사업 집행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이와 함께 고순도 불화수소 제조기술 등 핵심소재ㆍ부품ㆍ장비 관련 기술 관련 R&D 비용을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기재부는 “기존 법과 제도의 취지와 원칙을 유지하되, 우리 기업이 직면한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특정 조건 하에서 임시ㆍ한시적 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기업들이 단기적으로는 피해를 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우리 주력산업의 핵심 기술, 핵심 부품ㆍ소재ㆍ장비의 국산화 비율을 높여 오히려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오는 25일 발표할 세법개정안에도 기업들의 설비투자에 대한 대책이 담긴다. 설비투자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는 대기업의 생산성 향상시설 투자에 대한 투자세액공제율과 적용대상을 대폭 늘린다. 1년간 대기업은 현행 1%에서 2%로, 중견기업은 3%에서 5%, 중소기업은 7%에서 10%로 올라간다. 초기 투자단계에서 감가상각을 크게 인정해 세금을 덜 내고 투자금액을 조기에 회수할 수 있는 '가속상각' 제도의 적용 범위도 확대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임시적·한시적 조치’라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친노동'에서 '친기업'으로의 정책 방향 수정으로 보긴 어렵다”면서도 “그래도 사태 극복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정부의 정책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극일(克日)의 선봉에 서고 있는 기업들이 활력을 갖고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친기업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일본과의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외교전도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아베 총리가 지난달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게 개방적인 경제는 세계 평화와 번영의 토대”라고 발언한 직후 스스로 이런 원칙을 무력화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또 7∼8일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일본 수출 규제의 문제점을 성토한 데 이어 23∼24일로 예정된 WTO 일반이사회에도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해 이번 조치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진 경제보복이라는 점을 주장할 계획이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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