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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사도 화들짝… ‘게임 마니아’ 공무원의 약관 바로잡기

인생은 선택, 바꿔말해 계약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약관(約款)과 마주한다. 보험에 가입하거나, 이동통신사를 선택할 때, 집을 사고팔 때 그렇다.
 
게임을 할 때도 약관부터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게임회사가 만든 표준 약관에 유독 불합리한 ‘갑질’이 많았다. 법정대리인(부모)과 미성년자의 책임을 부당하게 묻거나, 선물한 게임 아이템ㆍ캐시에 대한 환불을 거부하거나, 게임 중 채팅한 내용을 무단 열람하는 내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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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내용을 포함한 국내 게임사 10곳의 불공정 약관을 바로잡았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덕분에 미성년 자녀가 부모 동의를 받지 않고 게임을 하다 발생한 요금에 대해 환불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약관 개정을 제안ㆍ주도한 주인공이 김석진(30) 공정위 약관심사과 법무관이다. 그는 자타공인 ‘게임 마니아’다. 올 초부터 한 판의 게임처럼 흥미진진하게 진행한 그의 조사 일지를 들여다봤다.
 
STAGE 1. 게임 마니아(Game Mania)
김석진 공정거래위원회 약관심사과 법무관이 세종시 숙소에서 게임을 틀어놓은 채 밀린 업무를 하고 있다. [공정위]

김석진 공정거래위원회 약관심사과 법무관이 세종시 숙소에서 게임을 틀어놓은 채 밀린 업무를 하고 있다. [공정위]

남보다 조금 빨랐던 것 같다. 유치원 때부터 게임을 했으니까. 집에서, 오락실에서, PC방에서 콘솔ㆍPCㆍ스마트폰으로 장르 불문 즐겼다. 최근엔 200만원이 넘는 게임용 노트북도 샀다. 지난해 8월 공정위 법무관으로 발령받은 뒤로도 업무 마치고 매일 한두 시간씩 게임을 한다.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BGM(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일한다. 게임 소리만 들어도 클래식 음악처럼 마음이 편해서다. 게임은 내게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연세대 로스쿨 재학 시절 게임 저작권 관련 논문 2편을 발표해 논문 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STAGE 2. 미션 스타트(Mission Start)
약관심사과는 불공정 약관을 심사해 바로잡는 게 주요 업무다. 일상적인 업무 말고도 특정 업계 약관을 겨냥한 ‘직권 조사’, 다시 말해 검찰로 치면 특수 수사도 한다. 회의 때 “게임에 관심이 많은데 게임사 약관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OK’ 사인이 떨어졌다. 공정위에서 게임사 약관을 들여다본 건 10년 만이었다. 약관을 파고들수록, 민원을 접할수록 여러 면에서 고칠 점이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른 회원에게 선물한 아이템ㆍ캐시는 환불이 불가능하고 손해배상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약관은 다른 업계 약관과 비교해도 문제가 많았다.
 
STAGE 3. 미션 챌린지(Mission Challenge)
혼자 10개 회사 약관을 뜯어보려니 3개월이란 시간이 빠듯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그래도 과정은 순탄했다. 수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법률가로서, 공무원으로서 게임 운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을 몰랐다. 무엇보다 게임사와 소통하는 과정에 막힘이 없었다. 어느 날은 한 게임사 직원들이 게임 캐릭터를 넣은 명함을 건넸다. “어 이건, 용 조련사 ‘트리스타나’네요” “눈싸움 달인 ‘말자하’를 넣으셨네요” 하자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우리보다 더 잘 안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었지만, 게임사에서 “정부 부처 공무원은 게임을 잘 모르는 데다 규제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은데 김 법무관 덕분에 좀 더 소통하기 편했다”고 하더라.
 
STAGE 4. 미션 클리어(Mission Clear)
공정위 약관 사건은 ‘전쟁터’다. 약관을 고쳤을 때 미치는 파문이 일파만파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약관 하나하나마다 꼬치꼬치 따진다. 어깃장을 놓기 시작하면 사건이 1년 이상 늘어질 때도 잦다. 공정위가 시정 명령을 내린 뒤 기업이 1개 약관만 잘못 바로잡았다고 판단해도 곧장 로펌을 선임해 소송을 걸곤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0개 게임사가 120여개 조항을 바로잡는 ‘대형 사고’였지만 잡음이 없었다. 모두 소송으로 가기 전 약관을 자진 시정했다.
 
STAGE 5. 새로운 미션(New Mission)
김석진 공정위 법무관이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공정위]

김석진 공정위 법무관이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공정위]

이달 31일이면 3년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공정위를 떠난다. 법무관으로서 정부 부처는 ‘거쳐 가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1년간 약관을 붙들고 싸운 건 법률가로서 행정ㆍ송무 노하우를 쌓을 소중한 기회를 하루도 허투루 보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특히 게임사 약관을 바로잡으면서 공무원 한 명 한 명의 작은 일이 국민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실감했다. 법무관이란 신분 앞에 ‘공익’이란 단어가 붙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변호사로서 새 출발 할 내게 주어진 새로운 미션은 공익이다.
김기환의 나공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세종시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고충과 애환, 보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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