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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수공예 교육 병행…창조적 예술가 길러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5>
20세기 초,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모방과 재현이라는 예술의 목적은 사진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해체됐다. 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회화로의 발전과정은 새로운 예술 방법론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예술, 모방서 벗어나 ‘편집’
그림 그리지 않고 오려 붙여
콜라주·포토몽타주 등 유행

예술가·장인이 함께 가르쳐
다재다능한 손재주꾼 양성

‘콜라주(collage)’가 등장했다. 콜라주는 ‘풀칠하기’ ‘붙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화가들이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려 붙이기 시작했다.
 
세잔의 영향으로 대상을 보다 단순한 단위(원통·원추·구체)로 분석하고, 그 단위를 다시 편집하는 실험을 거듭하며 ‘큐비즘(cubism)’을 주창했던 피카소와 브라크는 1910~1911년 무렵,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물감만 얹을 수 있었던 화폭에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오려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콜라주 화폭에 올라온 일상의 신문, 잡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재현’에서 ‘편집’이라는 예술의 방법론적 혁명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흥미롭게도 피카소와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에는 기타나 피아노 같은 악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상세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음표와 같은 기본 단위들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음악처럼, 미술도 모방과 재현의 강박으로부터 이제 자유롭고 싶다는 희망이다.
 
이텐, 클레, 칸딘스키 같은 바우하우스의 선생들도 그랬다. 그들은 대부분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그로피우스만 음악에 무지했다. 알마 말러는 음악을 교양의 필수로 여겼던 빈의 사내들과 다른 ‘프로이센 남자’ 그로피우스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들은 ‘왜 미술은 음악처럼 자유로울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형태’와 ‘색채’의 기본 단위로 새로운 조형예술을 추구했던 바우하우스는 ‘음악에 대한 미술의 열등감’, 즉 ‘시간예술’에 대한 ‘공간예술’의 근원적 열등감이 낳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학생 한 명에 두 명의 ‘마이스터’
 
바우하우스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전통적 수공예 장인이 함께 각 공방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사진은 바우하우스의 도기 공방.

바우하우스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전통적 수공예 장인이 함께 각 공방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사진은 바우하우스의 도기 공방.

시간이 지나면서 ‘콜라주’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조직된 다다이즘(Dadaism) 예술가들은 더욱 과감하게 시도했다. 종이는 물론 상표, 철사, 실 꾸러미, 심지어는 신체의 털에 이르기까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화폭에 붙였다. 그들의 시도는 ‘붙인다’는 의미의 ‘꼴라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보다 폭넓은 개념이 필요했다. 사회 풍자와 비판의 도구로 콜라주 기법을 확대해나가던 다다이스트들은 자신들의 방법론에 ‘포토몽타주(Fotomontage)’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진들을 ‘편집’하여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포토몽타주’는 기존의 사진들이 가진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편집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를 창조하는 새로운 예술의 ‘메타언어’를 가능케 했다.
 
포토몽타주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같은 맥락이다. 콜라주, 포토몽타주의 등장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는 각기 다른 카메라로 촬영된 장면들을 같은 시간적 흐름에 편집해 넣는 ‘필름몽타주(filmmontage)’기법을 찾아냈다. 동일한 장면의 영상도 그 전후로 어떤 장면이 편집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던 필름몽타주의 기능과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아이젠슈타인이나 쿨레쇼프와 같은 러시아 영화감독들이었다.
 
쿨레쇼프는 피험자들에게 영화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주고, 이어서 ‘죽은 아이’나 ‘따뜻한 스프’, 혹은 ‘섹시한 여인’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 결과 피험자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각기 달리 해석했다. 동일한 얼굴이었지만 ‘죽은 아이’ 사진이 나왔을 때는 ‘슬픈 표정’, ‘따뜻한 스프’가 나왔을 때는 ‘배고픈 표정’, ‘섹시한 여인’이 나왔을 때는 ‘음탕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른바 ‘쿨레쇼프 효과( Kuleshov effect)’다. 오늘날의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영화기법은 이 ‘쿨레쇼프 효과’의 연장선에 서 있다. 이 같은 혁명적 예술기법의 변화에 처음으로 학문적 대답을 구했던 것은 독일의 ‘게슈탈트심리학’이다. 지각의 심리학적 원리들을 파헤치며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게슈탈트심리학자들은 수시로 바우하우스에 와서 강의했다. 그러나 칸딘스키는 자신의 추상주의가 게슈탈트심리학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피식거렸다고 한다.
 
바우하우스에서 예술을 가르친 파울 클레의 유화 작품 ‘세네키오’(1914).

바우하우스에서 예술을 가르친 파울 클레의 유화 작품 ‘세네키오’(1914).

그로피우스는 시대를 읽는 천부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편집방법론’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바우하우스의 예술교육에 구현하고 싶었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로 초청한 선생들은 각 분야에서 이 편집방법론을 실천하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요하네스 이텐의 도움으로 ‘예비과정’은 바로 체계가 잡혔다. 한 학기의 예비과정을 마치면 각 학생은 자신의 적성과 관심, 그리고 예비과정의 성적에 따라 ‘공방(工房)’에 들어가도록 했다. 학생들은 전통적인 독일 도제제도에 따라 마련된 바우하우스의 공방에서 ‘도제’와 ‘기능공’의 단계를 거쳐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에는 독일 각 지역의 길드에서 시행하는 별도의 시험을 통해 ‘장인(Meister)’이 될 수 있었다.  
 
1920년 가을, 그로피우스는 각 공방의 학생을 두 명의 ‘마이스터’가 지도하도록 결정했다. ‘형태 마이스터’와 ‘수공예 마이스터’다. ‘형태 마이스터’는 앞서 설명한 새로운 예술방법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맡았고, ‘수공예 마이스터’는 전통적인 수공예 공방의 장인들이 맡도록 했다. 이텐은 “공방의 지도는 한 명이 맡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로피우스는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예비과정을 주도하는 이텐의 영향력이 공방교육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이유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공예와 예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 설립의 이념을 공방교육 과정에서 구체화하고 싶었다. 당시의 파격적인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독일의 전통적인 수공예 장인들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그 이중의 교육상황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마이스터’라는 호칭과 관련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바우하우스에 초빙된 선생들은 ‘교수(Professor)’ 호칭을 원했지만 그로피우는 단호했다. 공방의 수공예교육을 바우하우스의 교육목표로 제시한 이상, 선생들의 명칭은 수공예 ‘장인’인 ‘마이스터’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공예학교와 미술대학을 합쳐 만들어진 바우하우스의 위치가 어정쩡했던 이유도 있다. 예술대학도 아니었고 공예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이사한 후인 1926년이 되어서야 정식 조형대학으로 승인되었다. ‘마이스터’들은 즉각 자신들의 호칭을 ‘교수’로 바꿨다.(예나 지금이나 독일에서 ‘교수’의 호칭은 사회적 인정과 재정적 안정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그래서 교수는 집 문패에 반드시 ‘Prof. XXX(교수 아무개)’라고 써 붙인다.)
  
도기·벽화 등 9개 공방 설치해 교육
 
바우하우스 교사

바우하우스 교사

안팎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로피우스는 ‘형태 마이스터’와 ‘수공예 마이스터’의 이중 교육시스템을 통해 ‘브리콜레르(bricoleur)’의 수공예가들을 길러내려 했다. 불어로 ‘수공예가’를 의미하는 ‘브리콜레르’는 그로피우스의 개념이 아니다. 훗날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목적에 따라 철저하게 계산해가며 움직이는 현대의 엔지니어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원시사회의 ‘브리콜레르’를 내세웠다. ‘브리콜레르’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즉흥(Improvisation)’에 능한 ‘손재주꾼’을 의미한다. 그로피우스는 주어진 멜로디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즉흥연주를 시도하는 재즈연주자들처럼, 바우하우스 졸업생들이 전후 한정된 자원의 독일사회를 창조적으로 일궈나가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형태 마이스터들을 새로 초빙하는 것이 오히려 간단했다. 그로피우스에게는 충분한 인맥이 있었다. 하지만 수공예 마이스터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물자도 부족했고, 교육이 가능한 공방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속에 바우하우스는 1923년까지 도기·인쇄·직물·제본·목재 및 석재조각·유리 및 벽화·가구·금속·무대의 9개의 공방을 설치해 교육하게 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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