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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보다 먼저 압록강 건넌 펑더화이, 김일성 만나 밀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6>
위장막 설치하는 중국인민 지원군. [사진 김명호]

위장막 설치하는 중국인민 지원군. [사진 김명호]

40여 년 전, 10월 24일은 공휴일이었다. 명칭이 유엔데이, 그럴듯했다. 6·25 전쟁 때 유엔군이 우리를 구해 줬다고 고마워하던 시절 얘기였다. 금추시절(金秋時節)에 황금 같은 공휴일 하나 없어진 것 애석해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역사는 정체된 연못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상대 모르고 전쟁 나선 적 없다”
병력 호위도 없이 6일 먼저 도강
김일성 만나자마자 전황부터 물어

폐광 동굴에 지원군 사령부 차려
나흘 안에 초기 작전계획 수립 지시

중국은 하루 늦다. 10월 25일이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일이다. 미국과 대항하는 혈맹, 북한(朝鮮)을 지원(支援)하고, 가정과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출전을 자원한 지원군(志願軍)이 압록강을 건넌 날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중국을 떠밀고, 중국공산당이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하면 누구 몽둥이에 정강이 부러질지 모를 정도로 아직도 열기와 흥분, 자부심이 식지 않았다.
  
“맥아더 관련 책 두 권 읽었는데 겨뤄 볼 만”
 
둔황을 방문한 펑더화이. 오른쪽 여성은 ‘둔황의 수호신’ 창수훙(常書鴻)의 부인 리청셴(李承仙). 1950년 9월, 막고굴(莫高窟). [사진 김명호]

둔황을 방문한 펑더화이. 오른쪽 여성은 ‘둔황의 수호신’ 창수훙(常書鴻)의 부인 리청셴(李承仙). 1950년 9월, 막고굴(莫高窟). [사진 김명호]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6일 먼저 압록강을 도하했다. 1950년 10월 19일 밤, 라이트를 끈 녹색 지프 한 대가 압록강대교를 질주했다. 펑더화이와 정보참모 양펑안(楊鳳安·양봉안), 경호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무전시설 갖춘 대형트럭이 따라 붙었다.
 
60년 후, 양펑안이 구술을 남겼다. “펑더화이는 전황이 궁금했다. 지원군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김일성을 만나고 싶어했다. 극비행동이었지만, 적의 동향도 모른 채 무장병력 없이 도강한 것은 모험이었다. 10일간 잠을 제대로 못 잔 펑더화이는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양 눈도 벌겋게 부어 있었다.”
 
보다 못한 양펑안이 눈 좀 붙이라고 권했다. 펑더화이는 버럭 화를 냈다. “지금 잠이 오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 평정 되찾자 감개무량한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전쟁 외에는 딱히 해 본 일이 없다. 수십 년간 전쟁터만 누볐다. 오늘처럼 상대방의 상황을 모르고 나선 적은 없었다. 베이징에서 맥아더에 관한 책 두 권을 구입했다. 몇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해가 안 가면 별 내용 없는 거다. 위장과 대담한 포위로 적을 섬멸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겨뤄 볼 만하다.”
 
몇 시간 후, 북한 부수상 박헌영과 조우했다. 김일성과도 연락이 닿았다. 평안북도 창성군 대동(大洞) 쪽으로 차를 몰았다. 북쪽으로 철수하는 북한 군민과 가축, 차량이 줄을 이었다. 머리에 짐 보따리 올려놓고 압록강변 향하는 부녀자들이 인상적이었다.
 
6·25전쟁 시절, 마오쩌 둥의 지시 때문인지 중국지원군 문공단은 주민들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시절, 마오쩌 둥의 지시 때문인지 중국지원군 문공단은 주민들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운전병은 20이 채 안 된 둥베이(東北)인이었다. 지리와 지형을 알 턱이 없었다. 안전을 위해 차를 천천히 몰았다. 박헌영이 탄 차는 스탈린이 준 은회색 승용차였다. 속도가 빨랐다. 펑더화이의 차가 뒤로 처지면 기다렸다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성질 급한 펑더화이는 박헌영의 차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시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1000㎞ 떨어진 도쿄의 호화주택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자신의 적수가 될 중국 촌뜨기가 칠흑 같은 밤에 김일성을 만나러 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펑더화이는 20일 밤늦게 대동에 도착했다. 민가 몇 채가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21일 오전 8시 30분쯤 먼저 와 있던 북한주재 대리대사의 안내로 김일성과 회합했다. 마오쩌둥에게 첫 번째 전문을 보냈다. 회견 시간과 장소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마오의 답전도 간단했다. “조선인민군과, 조선노동당을 존중하고, 조선인민의 영수 김일성을 존중해라. 조선의 일초일목(一草一木), 일산일수(一山一水)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라.”
 
김일성의 환영 인사가 끝나자 펑더화이가 전선 상황을 물었다. 김일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적은 병력이 우세하다. 미 공군 엄호하에 밀고 올라오는 중이다. 저지에 어려움이 많다. 어제 미 공수부대 1000여 명이 평양 북방 숙천(肅川)과 순천(順川)지역에 침투했다.” 두 사람은 주변 물리고 밀담을 나눴다. 때가 때인지라 신통한 먹거리가 없었다. 촌에서 키운 닭 한 마리와 반찬 몇 개 놓고 점심도 함께했다.
 
펑더화이는 대유동(大楡洞)으로 갔다. 지원군 부사령관 덩화(鄧華·등화)와 회합했다. 대유동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골짜기였다. 양쪽 산자락에 있는 폐광(廢鑛)이 김일성이 안배한 지원군 사령부였다. 김일성이 있는 대동과도 멀지 않았다.
 
동굴 안은 습기가 많고 어두웠다. 펑더화이가 덩화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둔황(敦煌) 생각이 난다.” 몇 달 전까지 펑더화이는 서북 군정위원회 주석이었다. 둔황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다. “10월 25일 밤 작전회의 소집해라. 야전 지휘관 전원에게 통보해라.” 돌아서는 덩화에게 청푸(成普·성보)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덩화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참모 청푸 불러 “부디 살아서 돌아가라”
 
펑더화이는 무슨 일이건 화부터 내는 습관이 있었다. 돌대가리 소리 안 듣고 하루를 보내는 참모가 거의 없었다.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친 맹장(猛將)들도 펑더화이 앞에만 가면 오금이 저렸다.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청푸만은 예외였다.
 
이날도 달려온 청푸에게 눈웃음 보내며 등부터 두드렸다. “마오 주석과 함께 너 처음 본 지도 10여 년이 흘렀구나. 부디 살아서 돌아가라. 전쟁은 초기와 막판이 중요하다. 25일 밤까지 미군과 한국군 동향을 파악해라. 초기 작전계획 수립해서 보고해라.” 청푸의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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