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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외교에 목마른 시대, 세 치 혀로 나라 살린 외교관 탈레랑을 기억하다

14일은 프랑스 대혁명 230주년 기념일이다. 1789년 대혁명 뒤 프랑스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걸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풍전등화의 위기도 숱하게 겪었다. 프랑스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살아난 것은 혁명의 열정, 국력과 함께 뛰어난 외교력이 한몫했다. 프랑스 혁명사에는 국가 몰락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한 외교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로 혁명시대의 외교관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1754~1838년)다. 간단히 탈레랑으로 부른다.  

탈레랑의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탈레랑의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단두대 걸린 혁명기, 6개 정권에서 활동
1815년에 나온 프랑스의 한 카툰은 탈레랑을 ‘6개의 머리를 가진 남자’로 묘사했다. 서로 다른 6개의 정권에서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한 경력을 가리킨다. 그는 격정의 프랑스 혁명기를 살았다. 1789년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구체제를 말살했지만,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혁명 뒤 10년간 국민의회-제헌의회-국민공회(공포정치)-총재정부-통령정부를 거쳤다. 국민공회의 공포정치 시절을 거치면서 단두대가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로 혁명은 잔혹했다.  
1799년 들어선 통령 정부에서 종신 통령을 맡던 나폴레옹이 1804년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에 오르면서 대혁명으로 폐지했던 군주제가 부활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무너진 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른 왕정복고 시대(1814~1848년)를 맞았지만 1830년 혁명으로 밀려나고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필리프 1세가 즉위했다. 6개의 머리를 가진 탈레랑이 살았던 시대다.  
프랑스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여신. [중앙포토]

프랑스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여신. [중앙포토]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는 탈레랑을 찾아
이렇게 정권이 부침하는 가운데에서도 권력자는 탈레랑의 외교 능력이 필요했다. 구체제에서 지배층에 속한 가톨릭 주교였던 탈레랑은 프랑스 대혁명 뒤의 제헌회의와 통령정부, 나폴레옹, 복고왕정(부르봉가)과 루이필리프 1세(오를레앙가) 정권에 이르는 6개의 프랑스 정권에서 외교사절과 외교장관, 그리고 대사를 맡았다. 1792년 혁명정부의 외교사절로 영국에 간 것을 시작으로 총재정부와 나폴레옹 시절, 루이 18세의 복고왕정에서 각각 외교장관을 맡았다. 왕정복고 시절에는 프랑스의 초대 총리를 맡았다. 그리고 오를레앙 왕가 시절엔 주영국 대사를 지냈다. 이렇게 중용된 배경에는 물론 탈레랑의 뛰어난 능력과 풍부한 경험이 자리 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각 정권이 나라의 명운을 건 외교 분야에선 전문성과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 수도 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이전 정권이나 권력자에 대해선 무자비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구체제를 사실상 말살했으며, 통령정부는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총재정권을 무너뜨리면서 들어섰다. 통령정부는 나폴레옹이 1804년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에 오르면서 무너졌다. 복고왕정은 나폴레옹을 제거하면서 들어섰다. 통령 정부의 종신 통령이던 나폴레옹이 군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새로 들어선 정권은 한결같이 이전 정권을 적대시하며 사실상 적폐로 몰아 제거했다. 이런 혁명 상황을 고려하면 탈레랑이 정권에 상관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외교 책임자로 중용된 것은 경이적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1801). 그림과 달리 나폴레옹은 백마가 아닌 노새를 타고 현지 주민이 길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고 한다.[중앙포토]

자크 루이 다비드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1801). 그림과 달리 나폴레옹은 백마가 아닌 노새를 타고 현지 주민이 길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고 한다.[중앙포토]

 
나폴레옹 몰락한 최악의 순간, 나라를 살린 외교
탈레랑의 외교관 경력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패전국의 처지가 됐을 때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에 무너진 뒤 프랑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승전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와 등 승전국은 영토나 보상금을 요구하며 프랑스를 충분히 괴롭힐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외교관 탈레랑은 이를 외교로 풀었다. 우선 프랑스는 동맹군과 1814년 4월 16일 나폴레옹 퇴위 조건을 정하는 퐁텐블로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정부가 나폴레옹에게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을 영지로 제공하고 연금을 주는 조건으로 황제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내용이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떠난 뒤인 4월 23일에야 프랑스는 동맹국과 정전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정전협정은 단순한 선언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체결 당사자 사이의 가장 큰 문제나 장애물을 일단 제거한 다음에야 비로소 맺을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패전국 프랑스, 영토 보존하고 보상금도 면제
나폴레옹이 물러나면서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탈레랑은 다시 외교장관이 됐다. 그는 동맹국과 프랑스의 영토 처분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유럽에서 영토를 대거 확장했지만, 패전국이 되면서 이를 다시 돌려줘야 할 상황이 됐다. 자칫 프랑스의 영토를 배상으로 내놓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승전국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탈레랑은 5월 30일 프랑스의 영토를 1792년 대혁명 당시로 되돌리는 내용의 파리 조약을 승전국들과 맺었다.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프랑스가 병합한 영토만 내놓았다. 이는 원해 6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전쟁을 벌이던 도중 제안했던 조건이었는데 나폴레옹이 거절했다. 휴전 조건을 거절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 제안이 무효가 되고 더욱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탈레랑은 뛰어난 외교력으로 이를 관철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을 제거한 뒤 더는의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동맹국들의 심리를 이용한 외교전의 승리였다.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괴멸적인 패배 뒤에도 원래 영토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물릴 책임도 면제받았다. 놀라울 정도로 프랑스에 관대한 내용의 조약이었다. 4대 승전국 외에도 포르투갈·스웨덴·스페인도 파리조약에 서명했다. 탈레랑 외교의 승리였다.  
그 뒤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20일 파리에 도착해 군대를 조직해 동맹군에 맞섰다가 그해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완전히 몰락한 100일 천하를 겪으면서도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모습.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다. 베를린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환영했다.[중앙포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모습.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다. 베를린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환영했다.[중앙포토]

 
빈 회담 시작 땐 뒷좌석, 마칠 때는 유럽 주역으로
최악의 순간에도 국제정세를 꿰뚫고 이를 나라를 위해 활용하는 탈레랑의 외교력은 그 뒤 벌어진 빈 회담에서 더욱 빛났다. 빈 회담은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영국·프로이센·러시아가 1814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자리였다. 프랑스에 적대적인 오스트리아 외교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회의를 주도했다. 대혁명과 혁명전쟁,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궁지에 몰렸던 합스부르크의 본거지에서 열린 빈 회담에서 패전국 프랑스는 뒷전으로 밀렸다.  
탈레랑은 빈 회담에 프랑스의 협상가로 갔지만 가장 중요한 ‘입’이 묶였다. 회담의 의사결정권이 프랑스와 싸웠던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4개 승전국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유럽의 소국들과 함께 회담에 초대만 받았을 뿐 논의 과정에 개입할 수 없었다. 뒷자리에 앉아 구경이나 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상대국의 허점 파고들어 국익 취해
탈레랑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함께 회의 참가권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스페인과 함께 회의 참가를 허락받았다. 스페인이 곧 회의에서 빠지면서 프랑스는 승전 4개국과 함께 유럽의 장래를 논의하는 5대 당사자의 하나로 위상이 높아졌다. 패전국으로서 뒷자리에 앉도록 강요받았던 프랑스는 탈레랑이 외교력을 발휘한 덕분에 운전석에 자리를 잡게 됐다.  

게다가 탈레랑은 승전국 사이의 미세한 균열과 영토 욕심을 파고들었다. 당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노골적으로 영토 확장 욕심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이 독립국으로 만들어줬던  폴란드를 다시 합병하고 싶어 했다. 이미 폴란드 지역을 점령한 러시아는 다른 나라의 반대에도 끝내 이를 관철했다.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었던 러시아의 또 다른 영토 욕심은 영국과 프랑스의 우려를 낳았다.  

프로이센도 나폴레옹이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면서 독립국가가 됐던 작센 왕국을 병합하고 싶어 했다. 작센은 작은 나라이지만 교통의 요지이자 공업이 발달해 프로이센이 이를 합병할 경우 중부 유럽의 패권국가로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 완충지대 역할을 해온 작센이 사라지면 가뜩이나 경쟁국으로서 으르렁거려왔던 두 나라가 더욱 첨예하게 부딪힐 가능성도 있다.  

 
나를 모욕했던 과거 적국을 동맹으로 만들어
프로이센은 물론 러시아와도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는 이 두 나라를 견제하기를 원했다. 유럽 대륙이 세력균형과 안정 속에서 평화를 유지해 더 이상 개입할 일이 없기를 바라는 영국도 같은 생각이었다. 탈레랑은 승전국 사이의 균열이라는 국제정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각 비밀 접촉에 나섰다. 그는 조용히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했다.  
탈레랑은 1815년 1월 3일 영국 외교장관인 로버트 스튜어트, 오스트리아 외교장관인 메테르니히와 비밀조약에 서명했다. 비밀조약은 “세 나라는 국가의 안전과 독립을 지킬 목적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침범에 대항하는 데 무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동의한다”라는 내용이다.  
탈레랑은 이를 통해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웠던 4개 전승국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힘을 합쳐 프랑스에 과도한 압력을 가할 수 없게 했다. 게다가 영국, 오스트리아와 군사 동맹 수준의 관계를 맺었다. 과거의 적국이 순식간에 동맹국이 됐다. 탈레랑을 뒷자리에 앉히며 모욕했던 메테르니히는 국익을 위해 탈레랑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탈레랑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주도한 4개국 중 3개국과 사실상 동맹을 맺었다. 자신을 모욕했던 승전국 외교장관 메테르니히와도 손을 잡았다. 외교의 최종 목적은 결국 국익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프랑스는 이들의 힘을 빌려 유럽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강대국화를 막는 주축이 됐다. 탈레랑의 외교술 덕분에 프랑스는 패전의 고통을 딛고 다시금 유럽의 강대국으로, 국제정세를 좌우하는 핵심국가로 외교력을 복원했다. 그야말로 국가 몰락의 위기를 강대국 지위 회복의 기회로 바꾼 셈이다.  
 
권력자 말고 국가에만 충성한 인물인가
이런 탈레랑의 삶을 살펴보면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에만 충성한 전문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넓은 시각으로 세계의 변화를 내다보고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이다. 그를 달리 보는 시각도 물론 있다. 자신이 모셨던 ‘주인’을 헌신짝처럼 버린 냉혈한으로 비판할 수도 있다. 그는 우선, 대혁명에 참가함으로써 자신을 가톨릭 주교로 만들어준 루이 16세를 배반한 셈이 됐고, 귀족이자 성직자 가문인 집안과도 척을 졌다. 부친인 다니엘이 육군 중장을 지낸 백작인 군인귀족 가문 출신인 탈레랑은 신학을 공부해 사제가 됐으며 1788년 34세의 나이로 오툉의 주교가 됐다. 랭스 대주교였던 삼촌의 후광을 입었다.  
1789년 국왕 루이 16세가 신분제 회의인 삼부회를 소집하자 성직자 대표의 한 명으로 파견됐다. 삼부회에서 신분별 투표 대신 개인별 투표를 주장하면서 국민의회의 구성을 주장했다.  국민의회가 만들어지자 자신이 가톨릭 사제임에도 교회 재산의 국유화와 성직자 과세를 주장했다. 지금도 종교인 과세가 ‘뜨거운 감자’임을 생각하면 230년 전 그의 주장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하는 평민들의 편에 섰다.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을 넘어 대의에 충실했던 ‘혁명의 풍운아’였다. 그런 가운데 루이 16세가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동원하자 7월 14일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맞섰다. 230년 전 프랑스 대혁명의 개막이다.  
탈레랑은 1791년 주교에서 사임했으며,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바티칸의 비오 6세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이런 경력은 그에게 ‘혁명의 주교’라는 별명을 안겼다. 나중에 미터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만국 공통 도량형 제정’도 그가 제안했다.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다.  
탈레랑은 자신을 중용했던 나폴레옹도 결정적인 순간에 버렸다. 개인적인 부패와 사생활 문제도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오만한 태도로 프랑스 국력을 오판하고 국제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자 과감히 버리고 부르봉 왕실의 일원과 비밀리에 손잡았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그는 복고왕정이 자유주의·평등의 시대정신을 배반하자 또 버리고 1830년 혁명으로 들어선 오를레앙 왕가와 손잡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로 실력과 기회포착 능력을 가지고 국익이나 공익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꼽았다. 탈레랑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적 외교관일 것이다. 세 치 혀를 이용한 탈레랑의 외교적 설득 능력은 고려 시대 서희를 떠올리게 한다. 탈레랑과 서희 같은 외교관이 절실한 2019년의 한반도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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