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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 상드를 걱정하며 쇼팽이 두드린 '빗방울 전주곡'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2)
발데모사의 전경 사진(2003년). 발데모사는 마요르카의 작은 마을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발데모사의 전경 사진(2003년). 발데모사는 마요르카의 작은 마을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중해는 온화한 아열대에 속한다. 그러나 그해 겨울, 마요르카의 날씨는 혹독했다. 기온 자체가 낮지는 않았지만 체감 기온이 아주 낮았다. 강풍에 비가 자주 쏟아졌고 때로는 눈발도 날렸다. 상드는 얼음(ice)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쇼팽과 상드는 날이 풀리는 봄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주민들은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전염병에다 불치병인 폐결핵 환자의 일행이 마을에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그들을 이교도라고 적대시해서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는 하루하루의 전쟁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컸다. 이따금 프랑스 영사관에서 보내주는 식품도 어떤 때는 상해있었다.
 
하루는 상드가 아들 모리스를 데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18㎞ 떨어진 팔마 시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일행은 급류에 신발을 잃어버렸고 마부는 상드 일행을 버리고 달아났다. 상드는 어둠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6시간을 헤맨 끝에 자정이 휠씬 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쇼팽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고 그가 치고 있던 피아노의 건반에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에 빠진 그의 눈물이었다. 실성한 듯 보였던 그는 상드를 보자 울부짖었다.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그때 쇼팽이 연주한 곡은 ‘빗방울 전주곡(작품번호 28-15)’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 일행이 발데모사 지역 신부의 강론을 듣는 장면. 그는 눈[雪]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조르주 상드의 스케치, 1839, 발데모사 수도원의 쇼팽과 상드 기념관 소장.

쇼팽 일행이 발데모사 지역 신부의 강론을 듣는 장면. 그는 눈[雪]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조르주 상드의 스케치, 1839, 발데모사 수도원의 쇼팽과 상드 기념관 소장.

 
밤은 이미 깊었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상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병자인 자신은 이미 상드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홀로 남은 그곳은 외딴 수도원의 관같이 생긴 어두운 방이었다. 당장 의지할 것은 피아노밖에 없었다. 무서운 생각을 떨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을 것이다.
 
피아노는 처마 끝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따라간다. 곧 구슬프고,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피아노에 실린다. 자연의 화음이 쇼팽의 감성을 통해 아름다운 곡이 됐다. 쇼팽은 후두 결핵의 징후를 나타냈다. 쇼팽의 병은 점점 심해졌고 의사의 처방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원기를 회복하도록 보양식(beef-tea)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재료를 구할 수 없었다. 상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병도 병이었지만 쇼팽은 습하고 어둡고 으스스한 수도원의 분위기에 짓눌려 무서운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집 떠나는 것을 어려워했고, 낯선 곳도 두려워했다. 겨울이 계속되면서 쇼팽의 상태는 더 악화했다. 몸이 불편한 쇼팽은 더 예민해졌다. 상드도 지쳐갔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문제였다. 섬을 나가고 싶어도 쇼팽은 여행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어쩌다 몸이 좋을 때면 사나운 바다에 배가 묶였다. 여행객인지 수도원에 갇힌 죄수인지 불분명했다.
 
2월이 되자 쇼팽은 열이 났고 또 피를 토했다. 너무 약해서 먹지도 못했고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독수리는 황량한 수도원 위로 무리 지어 날아다니며 참새를 잡아먹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맴돌았다. 수도원을 돌보는 여인은 이 폐결핵 환자는 곧 죽을 것이고, 고해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그를 위한 무덤 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쇼팽은 여행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더 견딜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희망도 용기도 증발해갔다.
 
마요르카는 쇼팽과 상드에게 너무 가혹한 곳이었다. 날씨가 매서워 머무르기도 너무 추웠고, 파도가 높아 배를 타고 떠나지도 못했다. 쇼팽도 죽음의 문턱 앞을 오갔다. 수도원의 하늘 위에는 독수리가 날아다니며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사진 pixabay]

마요르카는 쇼팽과 상드에게 너무 가혹한 곳이었다. 날씨가 매서워 머무르기도 너무 추웠고, 파도가 높아 배를 타고 떠나지도 못했다. 쇼팽도 죽음의 문턱 앞을 오갔다. 수도원의 하늘 위에는 독수리가 날아다니며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사진 pixabay]

 
상드는 뱃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날씨가 가라앉았다. 즉시 배편을 예약했다. 돌아가는 길은 더 힘들었다. 각혈을 계속하는 환자를 데리고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가까이하지 못할 사람들로 낙인 찍힌 그들이었다. 주민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감염의 우려도 있어 아무도 마차를 빌려주지 않았다. 걷기 힘든 쇼팽은 짐수레에 실려 이동했다.
 
많은 짐 중에 특히 피아노가 골치였다. 무게 탓에 옮기는 것도 어려웠지만, 막 비싼 대가를 치르고 가져온 피아노는 가져갈 때 또다시 높은 관세를 내야만 할 처지였다. 마침 그곳에 있던 한 프랑스인 부부에게 그 피아노를 팔았다(이 프랑스인 부부의 상속인은 후에 그 피아노와 마요르카에 있던 쇼팽과 상드의 다른 흔적을 모아 발데모사 수도원 한쪽 방을 쇼팽과 상드의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1839년 2월 13일, 팔마에서 다시 ‘엘 마요르킨’을 타고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육지로 가는 유일한 배편인 엘 마요르킨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배와 나오는 배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나오는 배에는 돼지들이 가득 실려있어서 일행은 몹시 당황했다. 돼지는 계속해서 울어댔고, 지독한 분뇨 냄새를 풍겼다. 일등선실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전염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좋은 선실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한 것이 선장의 유일한 친절이었다.
 
18시간 남짓의 뱃길은 길었다. 쇼팽은 편히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한 사발의 피를 토했고 곧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했다. 긴급 구조전문을 보냈고 프랑스 영사관이 움직였다. 항구에 가까이 가자 쾌속선이 와서 쇼팽을 옮겨 실었다. 육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발데모사 수도원에 있는 쇼팽과 상드 기념관. 이 기념관은 쇼팽 일행이 실제로 묵은 방에 설치됐다. 기념관에 전시된 피아노는 쇼팽이 주민에게 빌려 사용한 것이다. 수도원에는 또 하나의 쇼팽과 상드 기념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쇼팽이 사용했던 플레옐 피아노가 전시돼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발데모사 수도원에 있는 쇼팽과 상드 기념관. 이 기념관은 쇼팽 일행이 실제로 묵은 방에 설치됐다. 기념관에 전시된 피아노는 쇼팽이 주민에게 빌려 사용한 것이다. 수도원에는 또 하나의 쇼팽과 상드 기념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쇼팽이 사용했던 플레옐 피아노가 전시돼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길고도 긴 3개월이었다. 천국을 꿈꾸며 먼 길을 갔다. 그러나 하늘은 악천후로 그들을 괴롭혔다. 주민들은 돌을 던졌고 차갑게 그들을 따돌렸다. 그곳에서의 체류는, 상드의 표현에 따르면, 쇼팽에게는 징벌이었고 상드에게는 고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마요르카는 그들을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쇼팽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전쟁으로 어지러운 스페인을 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위중한 병자의 상태는 여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야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들어왔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세상이 보였다. 번듯한 호텔도, 의사도 있었다. 음식도 입에 맞았다. 석 달을 그곳에서 머물면서 쇼팽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됐다. 비로소 여유를 찾은 두 사람은 모처럼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마요르카에서 기대했던 시간을 마르세유가 주었다.
 
마르세유에서 쇼팽과 상드는 둘의 관계와 서로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 둘이 겪은 극한의 상황은 두 사람의 본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상드는 쇼팽이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심한 통증과 거친 환경 속에서 참을성 있게 행동한다는 것을 높이 샀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샘솟는 그의 창작력에 놀랐다. 쇼팽은 상드가 헌신적으로 병자인 자신과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과 작가로서의 일을 초인적으로 해나가는 것에 경탄했다.
 
늦은 밤 폭우 속에 상드를 기다리며 피아노에 흘렸던 쇼팽의 눈물은 그의 삶이 완전히 한 여인에게 종속되었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병자 쇼팽을 보살피고 챙겨야 하는 상드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그 역할은 그와의 관계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었다. 깊이 사귄 지 오래 된 것도 아니었다. 상드는 쇼팽의 적나라한 모습에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자필 악보.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자필 악보.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러나 그 실상에도 상드는 개의치 않고 쇼팽의 장점만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유분방한’ 상드의 숭고한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역경이 다져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존경 위에, ‘희생과 헌신’ 그리고 ‘전폭적 신뢰와 의지’로 구현됐다. 이것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마요르카 여행에 대한 상드의 느낌은 확고했다. 다시는 발데모사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스페인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봄이 만개할 때쯤 그들은 마르세유를 떠나 북쪽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상드의 고향 노앙이 목적지였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에게 안식과 평화 그리고 창작의 자극을 준 상드의 고향 노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요르카에서 쇼팽이 완성한 작품 중에는 전주곡 작품번호 28이 있다. 구성된 24개의 짧은 곡 중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마요르카로 가기 전에 이미 구상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곳의 절망적 상황이 주는 복잡한 생각과 무거운 느낌이 마지막 터치에서 더해진 것 같다. ‘빗방울’은 그중 15번째 곡이다. 4번째 곡과 6번째 곡은 훗날 쇼팽의 장례식에서 연주됐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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