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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느슨한 정부의 대북 제재 고삐…틈새 파고 든 일본

대북제재 문제삼는 아베 정부의 노림수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과거 일본이 대북 전략물자를 밀수출한 사실을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 센터(CISTEC) 자료에서 확인했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과거 일본이 대북 전략물자를 밀수출한 사실을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 센터(CISTEC) 자료에서 확인했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4월 통일부 간부 P씨가 북한 남포항으로 향하는 대북 수해 구호물자 운송 선박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100장씩 묶인 돈다발 40개가 담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남의 눈에 드러날까 봐 분홍색 비누 상자에 은밀하게 숨겨진 40만 달러의 현금은 평양에서 내려온 북측 관계자에게 전달됐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작동하던 시점이라 경협 업체나 남북교류 사업자가 북한에 현금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적극 챙겨야 할 시점에 주무 부처인 통일부가 북한에 몰래 거액의 달러를 건넨 것이다. 더욱이 이 시점은 북한이 첫 핵 실험을 감행한 지 6개월 지난 때다.
 
당시 상황에 관여한 퇴직 간부는 “북한이 이산가족 화상상봉에 호응하는 조건으로 컴퓨터와 LCD 모니터를 요구해왔다”며 “전략물자라서 대북 제공이 금지된 물품을 직접 건네기 어려워 중국 등에서 구입해 쓰라며 달러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화상상봉을 포함한 이산가족 만남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고 결국 혈세만 날린 셈이 됐다. 후유증으로 남은 건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의지가 약하고, 금기시된 현금 제공까지 마다치 않는다는 인식이 미국과 일본 등 유관국 조야에 널리 번졌다는 점이다.
  
핵과 미사일 도발 수위를 한껏 올린 시점에 이뤄진 노무현 정부의 대북 현금 제공은 북한 당국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조선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대남 도발이 이뤄지는 상황이라도 돈다발을 들고 찾아온다”는 생각이 북한 최고지도자와 노동당·군부 중추세력을 오만함에 들뜨게 했을 수 있다. 거액의 현금을 챙긴 북한이 약속했던 이산상봉 행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중국에서 사서 쓰라고 한 일이 없다”고 거짓 해명을 한 당시 통일부 장관, 관련 보도를 내놓은 한국 언론을 겁박하고 나선 북한 대남라인의 태도는 대북 유화정책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키웠다.
 
대북 이슈에 있어 보수 성향을 보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2008~2017년) 북한에 대한 제재는 더욱 촘촘해졌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과 연평도 포격에 대응해 정부가 5.24 대북 제재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듬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본격화하면서 유엔 주도의 국제 제재도 강화됐다.
 
지난해 초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서면서 대북 제재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달 말에는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3자가 회동하는 ‘역사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지만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에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대북 제재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간 대북 공조를 강조하면서도 대북 제재와 관련해 온도차를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인도적 지원은 물론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대북 제재의 상징성을 지닌 문턱까지 낮출 기세다. 이 와중에 북한은 대북 제재 해제를 남북관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읽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으려는 듯 연일 압박과 비난 공세를 펼쳐왔다.
  
‘대북 제재 이행’ 공방으로 둔갑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일본은 이런 틈바구니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한·일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경제·외교적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대북 제재 카드를 핵심 쟁점의 하나로 꺼낸 것이다. 당초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 등 한·일 간 외교갈등에서 시작된 사안을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공방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현재로썬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근거 없는 선전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청와대와 정부·여당뿐 아니라 일부 야당까지 일본의 허위 주장을 공박하는 양상이다. 국회 국방위 소속인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어제 일본의 비정부기관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자료를 토대로 “일본이 핵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수출한 사실이 수십 차례”라고 지적한 것도 그중 하나다. 한국 정부의 관리·감독 부실로 전략물자가 북한에 흘러 들어갔다고 일본 측이 주장했지만 오히려 일본이 밀수출을 했다는 걸 일본 측 자료로 밝힌 것이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일본이 무리수를 뒀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팩트’ 반격만으로 일본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당국과 일부 언론매체들은 “한국 기업이 전략물자 156건 밀수출했다”는 등의 자료를 교묘히 덧붙여 국제무대를 대상으로 한 선전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이나 과거사 문제와 관련, 노련한 외교술을 발휘해 우리에게 적잖은 상처를 안겨 온 그들이다.
 
바짝 긴장하고 전략적 대응에 머리를 싸매야 할 상황이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덥지 못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감한 물자의 불법유출을 막지 못해 논란을 자초하고도 “적발 건수가 많다는 건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것”이란 안이한 주장을 내고 있다. 3년 동안 한·일 전략물자회의를 열지 않아놓고 “일본 측 국장이 공석이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입지만 세워주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국제사회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자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는 점이다. 비핵화 협상의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하는 제재를 무력화시킬 주장을 문 대통령과 정부 고위 당국자, 친여 성향의 정치인 및 전문가 그룹 인사가 쏟아낸 데 따른 것이다. 사업자의 답답한 심정을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섣부른 제재 해제 주장을 펼치는 한국 내 분위기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실제로 대북 제재의 빈틈을 노출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지난해엔 우리 업체들이 대북 제재 품목인 북한산 석탄과 선철을 대규모 밀반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기도 했다.
 
국제사회도 의심의 눈초리
 
문재인 정부의 대북제재 이행의지에 국제사회가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건 김대중(DJ) 정부 시절 대북 비밀송금의 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몰래 보낸 사건은 우리 국민뿐 아니라 서방국가에 큰 충격을 던졌다. 김정일과의 만남을 대가로 한 천문학적인 현금 제공이란 대목뿐 아니라 대북정보 기관인 국가정보원과 그 책임자가 나서 불법 환전소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국민 비판이 일었다. 미 의회 조사국(CRS)이 보고서를 통해 의혹을 제기하자 청와대와 정부가 나서 거짓 해명을 한 대목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노무현 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4명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돈을 받은 사실을 발뺌하며 “날조극”이라고 주장하던 북한도 그제서야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일본의 공세는 이처럼 대북관계에서 누적된 한국 정부의 전비(前非)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대북 제재에 대해 보다 깐깐하고 치밀하게 대응했으면 일본에 얕잡히지 않았을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 철학과 방식을 놓고 미·일 등 국제사회는 DJ·노무현 정부의 계승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베 정권은 이런 대목을 놓치지 않고 허위와 가짜 정보를 ‘팩트’와 적절히 배합해 국제사회가 진실로 믿게 만들려고 전력투구하는 양상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침묵하고 있고, 김정은의 북한은 한·일 간 반목과 괴리를 즐기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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