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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역 얼굴 안 보이지만 어차피 연기는 상상력”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감독. 내년에는 ‘난타’를 이을 새로운 넌버벌 퍼포먼스 ‘더 스페이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감독. 내년에는 ‘난타’를 이을 새로운 넌버벌 퍼포먼스 ‘더 스페이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기 복귀 소감부터 물으려던 인터뷰가 건강 이야기로 시작됐다. 오랜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온 ‘탤런트’ 송승환(62). 너무도 담담하게 “눈이 나빠져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본다”고 털어놓으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11일 종영하는 MBC 드라마 ‘봄밤’에서 권위적이고 속물적인 아버지 이태학 역을 맡아 시청자들을 만났다. 2016년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SBS) 이후 3년 만이다. 그 사이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기자로 돌아온 그를 만나러 9일 오후 서울 대학로 PMC프러덕션 사무실을 찾아갔다. PMC프러덕션은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의 제작사로, 그는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해에도 드라마 제의가 몇 건 있었는데 건강 때문에 못했다”면서 “다행히 지난해 11월부터 더 악화되지 않고 있어 이번엔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사실 지난해 올림픽이 끝난 후 공연계에선 그의 시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모니터의 강한 빛 때문에 안압이 높아져 시신경이 망가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전세계 수억 명 시청자를 겨냥한 올림픽 개·폐회식을 만들며 총감독의 시선이 모니터에 집중됐을 테니 제법 그럴싸한 해설이었다.
 
올림픽 때 과로가 원인이었나 봅니다.
“아니에요. 올림픽 때문이 아니에요. 모니터를 많이 봐서도 아니고요. 병명이 두 가지 나왔는데 하나는 황반변성이고, 다른 하나는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증이에요. 유전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송승환 예술감독이 자신이 고안한 확대기로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VR기기에 평볼록렌즈를 끼워넣어 만든 도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승환 예술감독이 자신이 고안한 확대기로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VR기기에 평볼록렌즈를 끼워넣어 만든 도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증세가 나타난 건 올림픽 폐회식 직후였다. 평창의 혹한에 시달린 그가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난타’ 전용관이 있는 태국 방콕으로 쉬러 갔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 얼굴이 흐릿해졌고, 휴대전화의 글씨가 안 보였다. 깜짝 놀라 귀국을 서둘렀다. 이후 그는 원인과 치료법을 찾으러 국내 양·한방 병원은 물론, 일본과 미국의 병원까지 다녀왔다.
 
충격이 컸을 것 같습니다.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어 솔직히 처음엔 겁이 났어요. 하지만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나니 ‘어떻게든 극복해보자’란 마음이 들더라고요. ‘안 보이면 듣지 뭐’ 란 배짱도 생겼고요. 그동안 해왔던 일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죠.”
 
그는 떨어진 시력을 보완할 방법을 여럿 고안했다. VR(가상현실) 기기에 평볼록렌즈를 끼워 넣어 모니터 영상을 또렷이 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그의 아이디어를 연극 소품 제작 스태프가 구현해낸 것이다. 그는 “내가 연극을 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하며 웃었다. 휴대전화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그는 아이폰의 ‘화면 말하기’ 기능을 사용한다. 시각장애인 지원센터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곳에서 알려준 대로 독일제 OCR(광학문자판독) 기기도 구입했다. 글자가 적힌 종이를 기기 위에 올려놓으면 음성으로 변환해 읽어주는 도구다. 그는 사무실에 놓여있는 OCR 기기를 시연해 보여주기도 했다.
 
대본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대사는 어떻게 외웠나요.
“문서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대본 파일을 받아 들으면서 외웠지요. 아이패드로는 대본을 듣고, 아이폰으로 내 대사를 녹음해 서로 비교해 들어가며 제대로 외웠나 확인했고요. 처음엔 불편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눈으로 보며 외우는 것보다 더 속도가 빠르던데요.”
 
연기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상대 배우 얼굴은 안 보여요. 하지만 연기는 어차피 상상력으로 하는 거잖아요. 안 슬퍼도 슬픈 척, 안 아파도 아픈 척. 그러니까 안 보여도 보이는 척하는 거죠.”
 
그가 연기한 이태학은 악역이다. 여주인공 이정인(한지민)을 비롯한 세 딸의 아버지이지만, 딸들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체면과 안위를 더 앞세운다. 그는 “그동안 악역을 많이 안 해봐서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재미가 컸다”며 “시청자들에게 이태학이 욕을 먹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연기에 복귀한 소감은요.
“일단 마음이 너무 편해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게 편하고 좋네요. 올림픽 때는 같이 일하는 출연자가 3000명, 스태프가 2000명, 자원봉사자가 1000명이었어요. 6000명을 지휘하는 감독을 하다가 이제 감독 지시받아 내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1965년 여덟 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한 그는 연기와 공연 제작,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며 살았다. 1997년 초연한 ‘난타’ 이후 성공한 문화산업 CEO 반열에도 올랐다. 그의 창작 열정은 여전했다. ‘별주부전’을 각색한 어린이 뮤지컬 ‘더 스토리 오브 언더더씨’를 만들어 지난 6일부터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초연 중이고, ‘난타’를 이을 새로운 넌버벌 퍼포먼스 ‘더 스페이스’는 내년 초연을 목표로 제작하고 있다.
 
다시 국가행사를 맡을 생각도 있습니까.
“아니요. 안 할 겁니다. 올림픽 잘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정말 절망적인 때가 많았고, 너무 힘들었어요. 잘 돼서 정말 감사해요. 한 번이면 됐어요. 그리고 이제 내 건강이 큰 행사를 치르기엔 역부족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쭉 연기와 제작만 할 계획인가요.
“네. 연기하고 공연 만들면서 살려고요. 연기나 제작은 할 때마다 새로운 일이에요. 이번 ‘봄밤’의 이태학도, 내가 태어나 처음 해보는 역할이었죠. 굳이 다른 일을 찾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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