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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1592년과 2019년, 우리는 바뀌었을까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엔 1592년 왜적이 침입했을 때 조선이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가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왜적은 20만명을 징발했는데 실록엔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먼저 온 4백여 척을 보고했고, 변장(邊將)이 단지 처음 보고받은 것을 근거로 이를 실제 수효로 여겼다”고 돼 있다. 그래서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에 실은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이라고 했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앞서 4일 한국을 향해 수출 통제라는 보복 조치에 돌입했다. 직후 국내에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를 치르니 보복 조치는 선거용이고, 선거가 끝나면 분위기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정부만 아니라 학계, 외교가, 일반인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국을 한 번 손봐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400여 년 전 처음엔 400여척 1만명인 줄 알았던 왜군은 개미처럼 몰려왔고 그 후 7년간 한반도를 초토화했다. 수출 제한 조치를 참의원 선거용으로 쉽게 생각하면 임진년의 ‘400척 보고’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1592년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 전해인 1591년 조선에서 간 통신사에 건넨 답서에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명(明)을 치겠다는 뜻을 알렸다.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했다. 명으로 가는 길에 조선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보복 조치에 앞서 한국에 경고장을 계속 보냈다.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 외교관들은 사석에선 마지노선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전이라며 그 전에 뭔가 한국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했다. 정부부터 일반인들까지 “일본이 해 봐야…”라고 코웃음 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았는가.
 
풍신수길을 직접 보고도 대책은 갈렸다. 수길을 봤던 통신사 황윤길은 돌아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정반대로 말했다. 실록엔 수길을 본 두 관료의 전혀 다른 인상 평가도 등장한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했다”고 했는데,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다”고 비유했다. 실록엔 김성일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오는 길목의 여러 왜진(倭陣)에서 왜장(倭將)들이 주는 물건들을 성일만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왜에는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그의 소신일 수 있다. 하지만 쥐 같다던 수길이 보낸 왜군은 명의 지상군을 벽제관에서 격파한 당시의 지구촌 정예병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 정부는 일본을 정말 우습게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이 정색하고 우리를 때리겠다고 나오면 그걸 막을 방패가 있는가. 방패가 없으면 우리도 역공할 몽둥이가 있기는 있는가.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산 첨사 정발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전투를 독려하다 함락된 성안에서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결국 죽었다. 준비되지 않는 전쟁에서 현장의 지휘관들은 죽음으로 왜군과 맞서야 했다.
 
1592년 부산 앞바다에서 시작된 왜란과 2019년 한국 반도체 기업부터 시작된 일본의 보복 조치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억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 건너 저 나라를 향해 흥분할 줄만 알지 대비는 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는 정말 통탄스럽다. 역사가 또 반복될까 두렵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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